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향수와 나타샤'

묵밥 한 그릇 먹고 '향수 길' 걸으며 꼬장한 시인의 정신 기려

벼르고 벼르던 정지용 시인의 생가를 찾아간다. 대구 동부도서관 독서회의 문학 기행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옥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이날 내가 할 일은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간략하게 이야기하고 그가 쓴 시 한두 편을 읽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문헌을 뒤지고 인터넷 서핑을 통한 자료 조사를 해 보았다. 일반 대중들이 다 알고 있는 이야기 외에 색다른 소개거리는 별로 없었다. 널리 알려져 있는 '향수'와 '고향'이란 시 뒤에 묻어 있는 풋풋한 첫사랑 같은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건 허사였다. 그건 백석이란 시인의 질펀한 사랑이야기에 비견할 만한 그 무엇을 지용에게 기대한 것이 애초부터 잘못이었다.

지용 시인이 살아 있다면 올해 111세, 1902년생으로 나의 아버지뻘이다. 그는 12세 때 동갑내기(송재숙)와 결혼하고 바로 서울의 휘문고보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초기 시를 훑어보면 고향의 아름다운 풍경이 주조를 이루는 가운데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얇은 실크 천에 가려져 있는 실루엣처럼 살짝 숨어 있다.

"얼골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 싶은 마음/ 호수만 하니 눈 감을 수밖에"(지용의 시 '호수' 전문) 이 시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드러난 기록은 없다. 시인의 성품으로 보아 고향에 두고 온 아내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가 분명한 것 같다.

지용은 올곧은 선비의 풍모를 지녔다. 올곧다는 말은 엇길을 갈 줄 모르는 새님이란 말과 통한다. 그는 휘문고보에서의 성적이 좋아 23세 때인 1925년 일본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대학에서 신사조인 서양의 모더니즘을 접하면서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게 된다. 유학생 잡지인 학조에 '카페 프란스'란 시를 발표하여 시인으로 두각을 나타낸다.

그의 연금술사적 언어 제련기술은 이 무렵부터 익히기 시작했으며 향수 또한 이때의 작품이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대학시절에 접하는 모더니즘에 이어오는 니힐리즘을 경험하게 된다. 이의 부산물이 연애와 자살이다.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호 水仙)과 김우진(호 水山)이란 동갑내기 예술가들이 현해탄에 몸을 던진 것이나 이수일과 심순애의 사랑이야기가 바로 일본 유학생의 모델이 된 것이다.

한 시대의 바람은 그것이 순풍이든 역풍이든 거역할 수는 없다. 당시의 모든 유학생들이 허무주의 사상에 심취했고 얼굴과 몸매가 반반했든 어쨌든 간에 너도나도 연애전선에 뛰어들었다. 동경 유학시절 지용의 행적은 문학 활동 외엔 뚜렷한 게 없다. 또 귀국 후 휘문고보의 영어교사로 재직할 때부터 이화여대 교수 및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그리고 경향신문 주간으로 일할 때까지도 이렇다 할 세간의 스캔들이 드러난 것은 없다.

나는 지용 시인을 생각할 때마다 '자야'(본명 김진향)라는 권번 기생 출신과 사랑에 빠진 시인 백석을 떠올린다. 백석은 '모던 보이'라는 애칭을 가질 정도로 문단 최고의 미남이었다. 큰 키에 멋진 헤어스타일과 옷 입는 감각은 감히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거기에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를 비롯해서 수많은 멋진 시들이 내면의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이에 비해 백석보다 열 살이 많은 지용은 작은 체구였지만 예지의 기상이 번득였고 눈빛이 광채를 뿜고 있었다. 그의 추천으로 문단에 나온 청록파 시인 중의 한 사람인 박두진은 "시인의 천재적 기질은 오만에 가까웠지만 엄숙한 풍모 속엔 소탈함과 자상함이 숨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지용의 '향수'가 좋으냐, 백석의 '나타샤'가 좋으냐는 읽는 이의 취향에 따라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멋쟁이 백석과 선비 지용의 무게도 천평저울에 올려봐야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그러나 아무래도 여자들이 보는 눈은 선비풍의 엄숙함보다는 배우 같은 미남 풍에 좀 더 마음이 끌리나 보다.

주관적인 입장에선 자신의 생애가 풍파 없이 밋밋하게 흘러가는 것을 선호하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땐 타인의 생애가 에로틱하면서 다른 한 편으론 드라마틱한 것을 더 좋아한다. 그건 복싱의 KO승, 야구의 홈런, 축구의 오버 헤드 킥 슛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이날 생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옥천묵집에서 육천원짜리 묵밥 한 그릇을 먹고 지용 시인의 '향수 길'을 두서없이 걸었다. 마을 길을 걸으면서 꼬장꼬장했을 선비 시인의 가슴 속에 어떻게 이런 옛이야기가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갔는지가 여전히 궁금했다. 이날 생가 앞 콘크리트로 도배되어 있는 실개천에는 얼룩백이 황소의 게으른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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