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반도의 가희'로 불린 김안라(하)

대표적 소프라노 가수 반열…한때 일제에 협력

마침내 1935년 3월, 김안라는 중앙음악학교 성악과와 증등과를 졸업하게 됩니다. 졸업 직후 김안라는 일본의 도쿄 중화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신진음악인 소개연주회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부릅니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 5월 초순에는 도쿄의 그 유명한 히비야공회당 무대에서 제6회 전일본 신인연주회가 열렸을 때 무대에 등장하여 소프라노 가수로서 그동안 연마해온 성악가의 실력으로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춘희) 가운데 아리아를 열창해서 큰 박수를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도 폴리돌레코드사 전속가수의 신분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던 상태라 김안라는 1935년 5월 17일부터 이틀 동안 도쿄의 본소공회당에서 열린 '조선유행가의 밤'에 동료였던 왕수복, 전옥, 김용환, 윤건영, 왕평 등과 함께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성악가수로서의 생활은 표면적으로는 화려했으나 생활은 곤궁해서 도쿄 신주쿠의 야간무대 물랭루즈와 니치게키(日劇)에서 가수로 일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같은 해 7월에는 조선일보 주최 음악회에 초청받아 김영일, 장비, 윤건혁, 임헌익(이규남) 등 일본 유학파 성악가들이 김안라와 함께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1935년 8월 22일 김안라는 자신이 태어난 원산으로 돌아와 고향무대에서 독창회를 열었습니다. 그날 조선중앙일보 기사는 다음과 같이 공연소식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원산이 낳은 천재 성악가 김안라 양의 독창회는 오는 24일 오후 8시 반부터 삼성원산관에서 동업 조선일보원산지국 주최로 본보(조선중앙일보) 원산지국 후원 하에 수삼 인사의 찬조조연과 안라 양의 옵바 김용환 군의 총지휘하에 개최한다는데 일반은 만히 내청하기를 바란다 하며 안라양은 천재적 성악가의 풍부한 소질을 가지고 소학교 시대로부터 발성법과 음조(音調) 융합(融合)에 치중하여 오다가 일즉 동경에 건너가서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하야 성악과를 마치고 다시 동경중앙음악학교 중등과를 금년 3월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얏스며 그후 금춘 독패신문 주최로 전일본 신인소개음악회에 출연하야 관중의 대환호리에 재삼의 박새를 바든 쏘푸라노의 명가수 그 일홈이 혁혁하다 한다."

1937년 7월 15일에는 도쿄에서 영화, 연극, 음악, 무용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인예술가를 총망라한 동경조선영화협회가 조직되었는데 이때 김안라는 주영섭, 이해랑, 서두성, 김영길, 임호권 등과 함께 멤버로 활동했습니다. 그해 9월 5일 동아일보 지상에 '예원인 언파레드'란 제목으로 대표적 양악음악인들을 소개하는 기사에서 김안라는 이인범, 장비, 김형구 등과 함께 이 시대를 대표하는 소프라노 가수로 명단에 오릅니다.

1940년 봄에는 오빠 김용환이 반도악극좌(半島樂劇座)를 조직했을 때 연기부 단원으로 고복수, 송달협, 박단마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왕년 니치게키의 가수' 특별출연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김안라가 1940년이 저물어가던 시절부터 일본군국주의 체제를 위한 적극적 협력의 자세로 변신을 하는 광경이 보입니다. 그녀는 11월 7일 오후 4시 50분 무용가 김민자와 함께 중국 북만주지역에 주둔하는 일본군위문을 위해 약 1개월 예정으로 하얼빈 일대를 향해서 경성역을 떠납니다. 아마도 무대에서는 '종군간호부의 노래'(김억 작사, 이면상 작곡)를 비롯한 군국가요를 열창했겠지요. 1945년 일본이 항복하던 해에도 김안라는 그해 2월 14일 중국의 서주지역 아세아가극단 초청으로 일본군 위문공연을 위해 약 6개월 예정으로 순회공연 길을 떠납니다. 돌아오게 되면 조선고전을 연구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것이라고 장래 포부를 말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오빠 김용환이 주도하는 태평양악극단에서 오빠 김정구와 함께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후 교통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서 가요계를 은퇴하고 조용하게 살다가 1974년 60세로 사망했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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