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50대 중반에 10여년째 '인생 3모작' 하종호 대구월성종합복지관장

사회운동가에서 與정치인으로, 지금은 복지현장에…

그는 이제 50대 중반의 한창 나이이다. 하지만 인생 3모작을 벌써 10여 년째 살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이 겨우 1모작으로 인생을 마무리하는 점을 고려하면 '특별한 인생'이라 부르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주변의 평가도 좋았다.

걸어온 길도 특이하다. 지역의 대표적 노동'환경'시민운동가에서 풀뿌리 정치인으로, 다시 사회복지 전문가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보수적 정서가 강한 대구경북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인생 행로다. 그러나 그의 도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2의 고향인 대구를 좀 더 긍정적인, 함께 살아가기 좋은 도시로 만들겠다는 게 그의 꿈이다. '마산 아재' 하종호(55) 월성종합사회복지관장의 이야기다.

대구 토박이보다 대구를 더 잘 아는 하종호 관장은 마산이 고향이다. 공부를 꽤나 잘해 부산경남에서 명문으로 꼽혔던 마산중학교를 졸업했다. 대구와의 인연은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계기였다. 1974년 서울과 부산부터 고교 평준화 제도가 도입되면서 비평준화지역으로 남아있던 대구(1975년부터 평준화)로 유학 오게 된 셈이다.

"목표는 경북고 입학이었는데 낙방의 고배를 마셨죠. 시험을 쳐서 들어가던 명문고 진학의 마지막 기회여서 전국에서 우수한 인재들이 워낙 많이 몰렸으니까요. 그래도 대구 생활은 재미있었습니다. 간간이 고교 시절을 떠올리면 옛 친구들이 그리워질 때가 많지요. 그런데 내년이면 대구에서 산 지 벌써 40년이네요."

외동아들로 부모의 기대를 잔뜩 모았던 그의 인생이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한 것은 1977년 경북대 공업화학과 진학 이후였다. 유신정권 말기의 대학가를 거세게 휩쓸었던 학생운동에 깊이 빠져들면서다. 그는 1979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것을 시작으로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계엄포고령 위반, 5'18 광주민주화운동 가담 혐의 등으로 모두 3번 구속된 핵심 운동권 출신이다.

지난 3월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위헌 결정을 내린 긴급조치 9호는 국민 기본권을 근거 없이 침해해 민주화운동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초법적 조항이다. 1975년 5월 '유신헌법의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의 주장이나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행위를 일절 금지하고 위반자는 영장 없이 체포한다'는 내용으로 선포됐다. 이후 10'26 사태 직후 폐기될 때까지 무려 4년 이상이나 지속되면서 800여 명에 달하는 구속자를 양산했다.

"제 위로 누나 둘은 대학 근처도 못 갔습니다. 지금도 그런 부모들이 있겠지만, 아들한테 모든 것을 투자하고 많은 것을 기대하셨던 게 저희 세대의 부모님이시잖아요? 마산 어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셨던 아버지가 말도 못 할 정도로 노여워하신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죠. 며칠 전 대입 시험을 치른 제 아들이 저와 같은 길을 걸을지도 모르지만…."

대학에서 제적된 그는 거제에 있는 대우조선소에 위장취업을 했다. 본격적인 사회운동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조선소 용접공 생활은 1년여 만에 끝이 났다.

"현장에 있어보니 노동운동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판단이 섭디다. 노동자 진영에 선 지식인일 뿐 노동자는 아니기 때문이었죠. 노동자인 척하면서 운동을 계속 한다는 것은 위선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후 고물상, 학원 강사 같은 일들을 잠깐씩 하면서 재야운동에 참여하다 환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진짜 국민 삶 속에 들어가 유익한 일을 해보자는 욕심이었죠.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분야에서 새로운 운동을 해보자고 제안했다가 운동권 동료들로부터 회색분자라는 욕도 많이 먹었습니다. 허허허."

대학 입학 이후 거의 10년이 지난 1986년 겨우 학사모를 쓴 그는 1994년 경북대 산업대학원에 진학했다. 1991년 대구환경운동연합의 전신인 '대구공해추방운동협의회'(이하 대구공추협)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한 환경운동에 전문성을 보태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는 이후 대구경실련 환경개발센터를 설립, 초대 사무국장을 지내면서 '금호강 희망찾기 프로젝트'를 추진했고 대구시의 '대구아젠다 21' 실무위원, '맑고 푸른 대구 21' 추진협의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지금은 환경단체가 적지 않지만 환경운동은 그때만 해도 미개척 분야였습니다. 당시 대구공추협 사무국장을 맡아 본격적인 이슈 파이팅에 나섰던 일이 기억에 생생합니다. 대구염색공단 폐수 무단 방류 사건의 파문은 일파만파로 확산됐고, 골프장의 농약 과다 살포 문제도 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지요. 1991년 3월에 터진 낙동강 페놀 오염 사태로 환경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부쩍 높아지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고질병이 다시 도졌다. 자신이 신명을 바쳐 하고 있던 일에 대한 회의였다. 민주화'노동운동을 홀연히 떠났던 것처럼 환경운동 현장을 벗어난 이유다.

"제 나이 마흔 무렵이었죠. 지금까지 해온 환경운동 방식이 실제로 우리의 환경에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를 고민해보니 한계가 느껴졌습니다. 환경 이슈를 발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의 의식을 친환경적으로 바꾸고, 관련 정책을 개발하는 운동이 더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7, 8년을 혼자서 계속 사무국장을 해오니 후배들한테 미안하기도 했고요."

그가 지역사회를 변화시키겠다며 새로운 도전의 장으로 설정한 곳은 지방선거였다. 1998년 지방선거에서 대구 남구에 출마, 대구시의원에 당선됐다. 그것도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공천을 받아서였다. 그의 '투쟁' 경력에 비추어보면 의외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돌아온 답변은 솔직했다.

"전혀 알지 못하던 한나라당을 무작정 찾아가 기회를 달라고 했습니다. 대구의 분위기로는 한나라당 공천이 아니면 당선되기 힘들다고 생각했거든요. 제도권 밖에서 싸우는 것보다 무대를 안으로 옮기면 낫겠다고 판단했는데 아예 들어가지도 못하면 안 되잖습니까? 20대부터 40대까지 죽 이어져 온 제 경력이 특이해서인지 공천을 흔쾌히 주더군요."

그는 2002년까지 단 4년간 의정 활동을 했지만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전국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유일하게 대구시만 제정하지 못했던 1999년의 '제2건국추진위원회 조례안'이 대표적이다. 대구시는 당시 시의회가 관련 예산을 삭감하자 조례만이라도 제정해 달라고 촉구했지만 그는 새로운 관변단체가 될 것이라며 반대, 결국 부결시키는 데 앞장섰다.

"1998년 시의회가 개원하자마자 열린 첫 본회의에서 상수도비 인상 조례안을 부결시킨 일도 기억납니다. 시의원 배지를 단 지 며칠밖에 안 됐는데 공공요금부터 올리는 건 저희를 뽑아준 시민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상임위를 거쳐 올라온 안이라 통과가 기정사실이었지만 제가 반대토론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확 뒤집어졌죠."

그는 시의원 재임 시절 대구시 집행부와 늘 대립각을 세웠다. 하지만 정작 대구시청 공무원 중에는 그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시의원과 공무원은 수평적 관계여야 한다는 초심을 지킨 덕분이다. 대구시 한 관계자는 "워낙 자료를 꼼꼼히 챙기다 보니 가끔 잘못된 지적을 해도 도리어 공무원들이 하 전 의원의 주장이 옳은 줄 착각하곤 했다"며 "유급화 이전이라 시의원 활동비도 얼마 안 됐지만 직원들에게 막걸리도 자주 사 '내부 제보자'가 꽤 있었다"고 귀띔했다.

그런 그가 인생 3막을 사회복지 분야에서 열게 된 것은 정해진 이치였을지도 모른다. 시의원 4년 동안에도 복지 관련 일들을 맡고 있던 교육사회위원회에서만 활동했다. 그래서 그가 2002년 대구 시립 달구벌종합복지관의 초대 관장에 임명되자 "자격증은 없지만 자격은 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낙하산'이 아니었느냐는 질문에도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달구벌복지관이 문을 열 준비를 할 때라 직원 선발, 장비 도입 등 기초 골격을 잡아야 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있을지도 모를 외부 압력에 버틸 수 있는 강골이 필요하다는 게 대구시의 판단이었고요. 복지 관련 상임위에서 대충 업무는 알고 있었지만 2003년에 사회복지사 2급, 2009년에 1급을 따서 이제는 전문성도 갖췄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2008년 대구 달서구 월성종합복지관 관장으로 옮겼다. 2005년 3월부터 대구시사회복지협의회 회장을 지내던 중이었다. 사회복지기관'단체들의 지원 조직 성격을 띤 이 협의회 회장은 대구의 사회복지시설 200여 곳의 대표가 총회에서 선출한다. 하지만 그는 현장에 가고 싶다는 이유로 일선으로 돌아갔다.

"솔직히 몸이 근질근질했습니다. 사람들과 부대끼고 싶었지요. 대접받을 일은 없지만 여기 일도 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노인'장애인 등 취약계층의 여가활동을 지원하는 사회적기업인 '햇빛나들이'는 5년째 운영하고 있는데 연매출이 6억원 정도 됩니다. 또 복지관이 경영을 지원하고 있는 마을기업인 '도시농장 싱싱한 팜'은 새싹 인삼을 재배해서 올해 5천만원의 매출을 올렸죠. 역시 현장이 제가 있을 곳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복지 포퓰리즘' 논란에 대해서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복지 총량을 늘리는 데 대해선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문제는 무조건적 지원이 오히려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부양의무자 기준을 완화하면 가족 간의 끈끈한 유대감이 사라질 수 있다고 봅니다. 경제적 능력이 있으면서도 부모 봉양을 국가에게만 맡기는 모럴 해저드가 가족 해체로 이어질까 두렵습니다. 복지 정책은 정밀하게 추진돼야 합니다."

◇하종호 관장=경남 마산에서 1958년 태어났다. 월영초교'마산중'대륜고'경북대 공업화학과를 졸업한 뒤 경북대에서 공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구환경운동연합 창립 위원, UN 환경회의 한국시민단체 대표단, 대구경실련 상임집행위원을 거쳐 1998년 대구시의원에 당선됐다. 대구생명의숲 공동대표, 대구시 사회복지협의회 회장을 지낸 뒤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 월성종합복지관장으로 2008년부터 일하고 있다. 정치를 다시 할 뜻은 없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건강한 시민정신을 갖고 있는 후배들을 돕는 역할에 만족한다"며 "공공선(公共善)에 대한 인식이 두터운 사람들이 내년 선거에서 많이 당선되길 바란다"고 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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