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말산업 1번지' 영천, 그린 넘어 달린다] ③왜 말의 고장인가

1세기 무렵 말 모양 유물 출토…조선통신사 마상공연도 열린 곳

부산박물관 소장품인
부산박물관 소장품인 '마상재도권'(28㎝×414.2㎝)은 조선통신사의 마상재 공연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작자'연대 미상. 부산박물관 제공
영천시 창구동 조양각에 오르면 금호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양각에서 조선통신사의 전별연이 열렸으며 금호강 건너편에서는 마상재가 시연됐다. 민병곤기자
영천시 창구동 조양각에 오르면 금호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조양각에서 조선통신사의 전별연이 열렸으며 금호강 건너편에서는 마상재가 시연됐다. 민병곤기자

영천시는 경마공원 조성 및 운주산승마자연휴양림 운영으로 경마와 승마 인프라를 모두 갖추면서 말 산업 육성의 최적지로 떠오르고 있다. 한일 문화교류의 상징인 조선통신사의 사행노정에서 마상재 공연이 가장 많이 펼쳐진 곳이 영천이다. 영천시 신녕면 매양리는 조선시대 지방역원의 중심인 장수역이 있던 곳이다. 영천시 금호읍 어은리에서는 1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는 마형대구(말 모양의 허리띠 물림쇠)가 나와 2천 년 전에도 말의 고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휴양림 속 승마장-운주산승마자연휴양림

영천시 임고면 운주산 자락에는 휴양림과 승마장이 함께 조성돼 있다. 73㏊ 규모의 휴양림에는 숲속의 집 15개 동이 조성돼 도시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승마장을 찾아 말을 타기에 제격이다.

휴양림 속에 조성된 16만5천여㎡ 규모의 운주산승마장은 실외승마장과 외승로 주변에 소나무를 심어 겨울에도 푸른 경관을 볼 수 있다. 산악승마코스(3.5㎞)에서는 말을 타고 울창한 솔숲 속을 달리며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다.

운주산승마장 옆에 거점 승용마 조련센터가 완공되면 시너지 효과를 거둬 경쟁력을 한층 높일 수 있다. 영천경마공원이 개장돼 운영될 경우 경주 퇴역마를 체계적으로 순치시켜 승용마로 다시 활용할 수도 있다. 승용마 조련센터에서는 일반 농가의 말도 훈련이 가능하다. 잘 순치된 승용마 보급이 늘어나면 승마 대중화에도 한몫을 할 것으로 전망된다.

푸른 숲을 볼 수 있는 운주산승마장에는 승마 체험객과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휴장일인 월요일에는 경주 서라벌대 마사과 학생들이 찾아와 승마 실습에 구슬땀을 흘린다. 서라벌대 마사과 추호근 교수는 "천장이 높고 창문도 많은 운주산 실내승마장에서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승마 실습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평일 운주산승마장에는 유소년승마단인 영천중앙초교 학생, 육군3사관학교 생도, 영천시여성복지회관 승마교실 수강생, 산자연학교 학생, 영천시청 승마단, 영천경찰 승마단, 공무원 승마아카데미 수강생, 금호중 학생 등 많은 사람들이 찾아 승마를 즐긴다. 주말이면 유치원생이나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승마장을 찾는다.

◆금호강변에서 '한류의 원조' 마상재 공연

영천시는 한류의 원조라 할 수 있는 마상재 공연이 가장 많이 펼쳐진 곳이다. 한일 문화교류의 상징인 조선통신사 사행원들은 한양에서 출발해 부산에 도착하기 전에 영천에 모였다. 이곳에서 경상감사가 베푸는 국가 차원의 전별연(이별잔치)이 열렸다. 일본 집권자에게 선보일 마상재도 시연했다.

조선통신사 사행원들은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차례의 사행 중 11차례나 한양에서 영천을 거쳐 부산, 일본으로 향했다. 영천에서의 마상재 공연 기록은 1636년, 1643년, 1682년, 1711년, 1748년, 1763년 등 6차례나 된다. 1719년에는 마상재 공연 기록이 있지만 조선통신사의 영천 경유 여부는 불확실하다.

조선통신사 전별연은 영천시 창구동 조양각에서 열렸고 마상재는 맞은편 금호강변에서 펼쳐졌다. 원래 명원루로 불렸던 조양각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부사 이용이 금호강변 절벽 위에 건립한 누각이다.

마상재는 말을 타고 부리는 기예나 사람을 말한다. '말 위에서 서서 타기' '말 등의 왼쪽으로 뛰어넘기' '말 등의 오른쪽으로 뛰어넘기' '말 위에서 물구나무 서기' '말 위에서 뒤로 눕기' 등 8가지 말타기 재주가 포함된다.

1763년 8월 16일 자 사행록에는 영천 조양각에서 전별연 상을 차리고 풍악을 울리며 마상재를 시연한 기록이 나온다. 영남의 성대한 모임으로 구경하는 사람이 거의 1만 명을 헤아렸다는 기록도 있다. 마상재는 일본 에도(도쿄) 공연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현재 영천 조양각이 위치한 조양공원에는 '조선통신사의 길' 표지석만 있을 뿐 마상재에 대한 내용이 없어 아쉽다. 조양각에 올라 건너편 금호강변을 바라봐도 텅 빈 현대식 도시공원만 있을 뿐 마상재를 펼칠 수 있는 냇가는 없다.

그나마 마상재 재조명을 위한 학술대회가 이달 28일 영천에서 열릴 예정이다. 한혜련 경북도의회 부의장은 "조선통신사의 길을 재조명하고 마상재를 복원할 경우 한'일 양국의 미래관계를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 계기가 될 뿐 아니라 말산업 육성을 위한 상징적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장수역 관련 포은과 다산의 시

조선통신사 사행원들이 영천에 이르기 전 들렀던 장수역은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간선도로로 영천, 경주, 울산을 연결하는 장수도(長水道)의 중심역이었다. 영천시 신녕면 매양리로 신녕중'영천상고의 정문 왼쪽 마을에 장수역의 관가샘이 복원돼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대문 옆에 붙어 있는 '찰방길'이란 작은 거리 명패가 눈길을 끈다. 마을 길은 역의 관리를 맡았던 찰방(종 6품)의 벼슬 이름을 따 '찰방길'로 붙여졌다. 영천시내∼신녕 구간 옛 국도 28호선은 '장수로'로 이름 붙였지만 예전 장수도의 일부에 불과하다.

조선 태종 17년(1417년) 신녕현이 영천시 화남면에서 장수역 인근으로 이전됐을 때는 17개 속역을 거느렸다. 조선 세조 8년(1462년)에는 영일, 송라, 흥해 등 일부 역을 송라도(松羅道)에 넘겨주고 신녕을 중심으로 군위, 영천, 경주, 울산, 경산의 속역을 관할했다. 고종 때 장수역과 속역의 역마는 대마 13마리, 중마 29마리, 소마 95마리 등 137마리에 달했다.

장수역과 관련해 포은 정몽주(1337∼1392)와 다산 정약용(1762∼1836), 고려 공민왕 때의 문신 권사복 등이 시를 남겼다.

포은 정몽주는 1377년 9월 일본으로 사행을 떠나던 도중에 장수역에 들러 고국을 떠나는 감정이 물씬 배어 있는 시를 남겼다.

다산 정약용은 '부친을 모시고 은해사에 놀며'라는 제목의 시에서 역마길을 언급했다. 다산이 언급한 역마길은 장수도를 말하며 당시 장수역을 거쳐 안동, 서울로 돌아간 것으로 추측된다. 다산은 부친을 모시고 영천 금호강변의 호연정도 찾아 시를 남겼다. 호연정은 제주목사를 지낸 병와 이형상(1653∼1733)이 벼슬을 그만두고 30여 년간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한 곳이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은 공재 윤두서의 손녀사위이다. 윤두서의 셋째아들 윤덕렬의 딸이 다산의 어머니이다. 공재는 병와의 조카사위이다. 윤두서의 부인 전주 이씨는 이형상의 형인 이형징의 딸이다. 다산은 인척관계와 학문적 관심으로 영천 호연정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권사복은 '장수역 벽상유제'라는 제목의 시에서 '내 일찍 여기 와서 이 관에서 놀았거니/ 꽃을 보며 한종일 봄바람에 취했었네/ 이제 오니 사람 일은 옛날 같지 않은데/ 꽃은 옛 그대로 붉던 곳에 붉구나'라고 읊었다.

영천'민병곤기자 minb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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