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재'나 '제'자가 들어가는 사람들은 전화로 자기 이름을 이야기해 줄 때 꼭 '아(어)에 입니다.' 하는 말을 덧붙인다. 이것은 우리말의 'ㅔ'와 'ㅐ'의 발음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 보자면 'ㅐ'는 가장 입을 크게 열어서 발음하는 모음인 'ㅏ'보다는 입을 약간 덜 벌리고, 혀의 앞부분을 이용해서 소리를 낸다. 'ㅔ'는 'ㅐ'보다도 입을 덜 벌리고, 소리를 내는 혀의 위치가 더 앞으로 간다. 모음의 조음 위치를 정리한 모음 삼각도상으로 보면 'ㅔ'는 'ㅣ'에 가깝고, 'ㅐ'는 'ㅏ'에 가까운 소리가 된다.
아나운서들은 그 소리를 구분해서 발음을 하지만 일반인들의 경우는 들어도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음을 할 때도 마찬가지로 구분해서 발음을 하지 않는다. 한 예로 '계, 게, 개'의 경우 발음이 거의 동일해서 구분을 잘 하지 못한다. 경상도에서는 미세한 발음 차이를 구분하려고 하는 대신 확연하게 차이가 나는 모음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베개'의 경우 경상도 사람들은 '비개'라고 발음하지만 '비기'라고 발음하지는 않는다. '내 것 네 것'의 경우도 발음상으로 구분이 어렵기 때문에 '네 것'은 '니 것'으로 발음한다. 'ㅔ'가 'ㅣ'로 바뀌는 이유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ㅔ'는 'ㅣ'에 좀 더 가까운 소리이기 때문이다.('ㅔ'를 써야 할지 'ㅐ'를 써야 할지 헷갈릴 때, 경상도 사람들은 'ㅣ'로 소리가 날 수 있는 것은 'ㅔ'를 쓰면 된다.)
1989년에 맞춤법을 개정할 때 '찌게'를 '찌개'로 통일했는데, 이것은 'ㅔ'와 'ㅐ' 발음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을 인정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왜 잘 구분이 되지 않는 발음을 구분해서 쓰려고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발음상으로는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문자로 적어 놓았을 때 시각적으로는 분명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특히 한자어의 경우는 오랫동안 써 오던 관습이 있기 때문에 쉽게 바꾸지를 못한다. 예를 들어 '결제'(決濟)의 경우 대금을 주고받아 거래를 끝내는 일을 뜻하는데, 이를 결재로 통일했을 경우 제출된 안건을 처리한다는 의미를 가진 '결재'(決裁)와 혼동이 올 수가 있다.
이런 현상은 과거에도 있었던 것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00년이 지난 16세기가 되면 '·'(아래 아)와 'ㅏ'의 음의 차이가 거의 없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는 20세기 초반까지 계속해서 쓰이다가 1933년에 한글 맞춤법이 제정되면서 대부분 'ㅏ'로 대체가 된다. 소리의 차이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를 계속해서 썼던 이유 역시 문자로 적었을 때의 시각적인 느낌 때문이었다.
이런 예들은 말이라는 것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는 미세한 변화들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능인고 교사 chamt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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