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초 한중 무역을 좌지우지했던 임상옥은 중국어에 능통하고 현지 상관행에 정통한 중국 전문가였다. 19세기 초 연해주를 휩쓴 조선 무역왕 최봉준 역시 러시아어에 능통한 러시아 전문가였다. 21세기 바야흐로 장보고의 피를 물려받은 '글로벌 보부상' 전성시대다.
베트남 전문가 S&H 인터내셔널의 김동영(51) 대표는 베트남을 무대로 장보고의 꿈을 키워가고 있는 글로벌 보부상 가운데 한 명이다. 삼성물산 출신인 그는 1996년부터 6년 동안 호찌민 파견 근무를 했다. 그러다 홀로서기에 성공, 현재 직원 20명을 거느린 무역업체를 11년째 경영하고 있다. S&H는 한국과 베트남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의 교역을 망라하는 일종의 종합상사다. 주로 화학약품이나 기계류 등을 한국에서 들여오고 고무나 라텍스 같은 원자재류를 한국으로 수출해 이윤을 남기고 있다. 최근에는 베트남 유통시장 개방 추세에 맞춰 한국산 소비재를 수입'유통하는 일에 힘을 쏟고 있다.
◆베트남 전문가
김 대표가 주로 하는 일은 무역과 유통업이지만 그는 정작 자신을 '무역통'보다는 '베트남 지역 전문가'로 불리길 원했다.
"무역업으로는 내세울 게 별로 없어요. 한국 대기업 계열 종합상사가 모두 진출해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제조업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호찌민 시내에 자리한 회사에서 만난 그는 수더분한 표정으로 허허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회사 자랑보다는 베트남 같은 신흥 수출시장에서 그 지역 전문가가 부족한 현실부터 얘기를 꺼냈다. 현재 베트남에 진출해 있는 한국계 업체 수는 현지 투자기업뿐만 아니라 자영업자까지 포함해 모두 1천800여 개에 달한다. 대기업은 베트남 지역 전문가 육성 계획을 잇따라 발표하고 있고, 경제연구소들도 앞다퉈 베트남 관련 세미나를 개최하거나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베트남은 우리에게 신흥시장으로서 여전히 인기 상종가를 달리고 있다.
"문제는 개별 중소기업입니다. 대기업처럼 지역 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베트남에 대한 일반적인 자료는 인터넷으로 구할 수 있지만 세부적인 시장 상황 같은, 정작 필요한 현지 정보는 중소업체로서는 제대로 얻기 어렵습니다."
교민이 8만5천여 명이나 되는데도 한국의 개별 중소업체가 베트남 시장을 개척하는 데 도움을 얻을 만한 인력과 서비스를 교민사회에서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박근혜 대통령이 베트남을 방문한 자리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진출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지원책 강구를 언급한 것도 이런 맥락과 무관하지 않다.
◆중소벤처기업 진출에 도움 주고파
김 대표는 사업 초기 자금 조달 문제만이 아니라 사업상 네트워크 구축이 중소기업이 직면한 최대 과제라고 보고 있다. 베트남은 기회의 땅이지만 잘 모르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대기업조차도 베트남 진출 초기에 파트너를 잘못 선택해 5, 6년간 고생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베트남 역시 인맥과 네트워크로 사업이 이뤄지는 만큼 실력만으로 비즈니스를 잘 해내기는 어렵습니다. 현지 시장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판로 개척 노하우를 쌓지 않으면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지요. 베트남에 진출하고자 하는 개별 기업이든 자영업자든 성공시키고 연착륙하도록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김 대표는 17년 동안 베트남 생활을 통해 다져놓은 자신의 노하우와 인맥, 경험이 베트남 진출을 원하는 기업가들을 위해 널리 활용되길 원하고 있었다. 고향이 의성이며 경북도 해외통상자문위원이기도 한 그는 특히 해외 진출을 희망하는 경북지역의 중소'벤처기업에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지금 도전하라
(사)벤처기업협회(KOVA) 호찌민지부 의장을 맡고 있는 김 대표는 호찌민 시내에 국내 벤처기업을 위한 상설 마케팅 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벤처기업협회는 국내외 중소'벤처 기업의 자금, 해외시장 개척, 인력지원, 마케팅, 컨설팅 분야 등 모든 경영 활동 요소를 지원하고 있는 단체다. 그는 베트남이 청년 창업가에게 기회의 땅이 될 수 있다고 자신한다.
"한마디로 미국 실리콘 밸리보다 낫습니다. 미국에서 주류 소사이어티에 진입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렵잖아요. 섬유, 봉제, 신발 같은 경공업은 옛말입니다. 중공업과 IT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빠르게 개편되고 있거든요. 앞으로 베트남은 포스트 차이나로서 중요한 거점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 한국에서 갈 곳을 못 찾는 중화학 2'3차 산업체들은 지금이 적기입니다."
베트남 호찌민에서 글'사진 우태욱기자 woo@msnet.co.kr
◆호찌민 한류 열풍…곳곳에 한국 기업 광고
김 대표와의 인터뷰 일정을 마친 다음 날 호찌민 중심가로 나가봤다. 시청, 우체국 등 관공서가 몰려 있는 '다이아몬드 백화점' 근처가 최대 번화가다. 백화점 벽면 광고를 보니 상당수가 한국 기업 광고다. 매장이 입점한 1~3층 층마다 주말이라서 그런지 쇼핑객들로 붐볐다. 삼성전자나 LG전자의 가전제품만 따로 파는 매장도 보였다. 주변 오피스건물에도 한국기업 간판이 눈에 많이 띄었다. 점심식사를 위해 인근 한식당을 찾았다. 현지인들도 더러 보였다. 10년 전 개점 당시 한류 열풍을 톡톡히 봤다는 식당 주인은 지금도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어 베트남인 단골이 많다고 했다.
이번에는 택시를 타고 전통시장으로 가봤다. 일요일인데도 평일 출퇴근 시간대처럼 오토바이들이 도로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 멀리 롯데마트가 보였다. 김 대표 말처럼 유통시장이 개방되면서 대형소매점이 속속 생겨나는 듯했다. '벤탄'이라 불리는 전통시장에 도착했다. 미로 같은 좁은 통로를 따라 수도 없이 늘어선 점포들마다 인파로 가득했다. 좀 전에 들렀던 백화점 손님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서민들은 문턱 높은 백화점과 대형소매점보다는 시장을 찾는 것 같았다.
빈부격차일까. 과거와 현대의 공존이라고 할까. 명품으로 치장한 백화점 쇼핑객과 마주친 지 불과 서너 시간 만에 100~200원짜리 '퍼'(베트남 쌀국수)를 먹는 시장 손님을 보고는 잠깐 이런 의문이 들었다. 여러 점포에 들를 때마다 점원이 한국에서 온 관광객인 줄 단번에 알아보고 한국말로 인사를 건넸다. 바구니에 물건을 한가득 실은 아오자이 차림의 젊은 여인이 어디론가 바삐 뛰어가고 있었다. 모두들 활력이 넘쳐 보였다.
호찌민 시내를 벗어나 외곽 공업단지로 향했다. 택시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에서도 활력을 느낄 수 있었다. 역동적 성장, 그 자체였다. 신도시건설 현장을 방불케 한 이곳에는 대형 크레인과 레미콘 행렬이 대로변을 따라 군데군데 이어졌다. "잠자고 있던 땅에서 깨어나 용트림을 하고 있다"는 김동영 대표의 표현 그대로였다.
우태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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