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간토 대지진

1923년 9월 1일 정오 무렵. 도쿄만 남서쪽 사가미만 해저에서 규모 7.9의 강진이 일어났다. 지진은 요코하마만의 항로를 타고 도쿄를 빠르게 덮쳤다. 일본 특유의 목조가옥이 즐비한 간토지방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됐다. 70여만 호의 집이 불타거나 무너져 내렸다. 14만여 명의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냈다. 일본 정부는 이를 수습할 아무런 능력도, 대책도 없었다.

정부에 대한 불만은 엉뚱한 곳으로 향했다.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고 방화약탈을 하며 일본인을 습격하고 있다"는 헛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내무성은 각 경찰서에 "조선인들이 방화와 폭탄에 의한 테러, 강도 등을 획책하고 있으니 주의하라"는 공문을 보내 기름을 부었다.

졸지에 조선인들이 희생양이 됐다. 자경단을 조직한 일본인들은 조선인을 골라내 닥치는 대로 죽였다. 심지어 경찰서 유치장으로 피신한 한국인까지 끌어내 죽창으로 찔렀다. 일본식 복장을 한 한국인을 가려내기 위해서는 '십오엔 오십전'(十五円五十錢'じゅうごえんごじっせん)이란 말이 사용됐다. 발음이 이상하면 바로 학살했다.

당시 숨진 조선인 숫자에 대해서는 설만 분분했다. 일본인 요시노 사쿠조는 조선인 희생자 수를 2천534명이라 했고 한국인 김승학은 피해자가 6천여 명이라고 적었다. 실제 피해자 수는 2만 3천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 도쿄의 주일한국대사관 옛 서고에서 '관동대지진 피살자 명부'와 '3'1운동 애국자 피살 명부' 등이 대거 발견됐다. 주일대사관이 지난 6월 청사 이전과정에서 이 명부들을 발견해 국가기록원으로 넘겼다는 것이다.

이 명부들은 한'일 국교정상화 협상과정에서 대일 협상 자료로 쓰기 위해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한'일 청구권 협정(1965년)을 앞두고 우리 정부가 피해 근거 확보 차원에서 만든 문서에다 주일 대사관이 현지 추가 조사를 거쳐 완성한 명단으로 보인다. 간토대지진의 희생자 명부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희생자 수는 역사 바로 세우기 차원에서도 민감한 문제다. 정작 자료를 쥔 일본은 모르쇠로 일관하기 일쑤다. 이 귀중한 서류들이 존재 사실도 알려지지 않은 채 수십 년 동안 대사관 서고에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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