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우리 시조로 푼 한시] 遷居(천거) / 졸옹 최해

오히려 성현의 경전은 수레에 가득하네

예나 지금이나 학문하는 사람들의 대체적인 성향은 책 속에 '푹' 묻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연과학이나 사회학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문학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쌓이는 것이 책이다'라는 볼멘소리를 듣는다. '문'사'철'이라고 했으니 문학'철학'사학의 책은 봇물이 쏟아지도록 쌓이니 할 말은 없겠다. 고려의 한 선비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막상 이사를 하려고 하니 경전이 수레에 한 짐이었다고 읊은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평생의 자기 사업 잘못됨은 선비된 것

자신을 도모함이 졸렬하고 엉성했네

경전이 수레 가득한 걸 무엇이 걱정인가

平生業已誤爲儒 是處謀身拙且疎

평생업이오위유 시처모신졸차소

莫怪遷居無物載 聖賢經典尙盈車

막괴천거무물재 성현경전상영거

【한자와 어구】

平生業: 평생의 사업/ 已誤爲儒: 선비가 된 것이 이미 잘못되다/ 是處: 이곳에서/ 謀身: 자신을 도모하다/ 拙且疎: 졸렬하고 옹졸했다/ 莫怪: 기이할 것이 없다/ 遷居: 이사하다/ 無物載: 실을 물건이 없다/ 聖賢: 성인과 현인/ 經典: 종교의 교리를 적은 책/ 尙: 오히려/ 盈: 가득 차다/ 車: 수레

'오히려 성현의 경전은 수레에 가득하네'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졸옹(拙翁) 최해(崔瀣'1287~1340)로 고려 충숙왕 때의 학자다. 17세에 과거 급제하여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 등의 벼슬을 지냈다. 1320년 34세에 장흥고사(長興庫使)로 있다가 원나라에 파견돼 1321년 원나라 과거에 합격,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이 되었으나 신병을 핑계로 5개월 만에 귀국한 뒤 검교(檢校)'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평생의 사업은 잘못 선비가 된 것/ 이곳에서 자신을 도모함에 졸렬하고 엉성했구나/ 이사를 하는데 실은 물건이 없다고 괴이하게 여기지들 말게/ 내 가진 성현의 경전은 오히려 수레에 가득하다'라는 시상이다.

시제 '遷居'(천거)는 '이사하다'로 번역된다. 자신의 아호를 '옹졸한 늙은이'로 했던 것만 보아도 무언가 잘못 선택한 인생을 후회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아호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선비가 된 것까지를 후회하는 것은 아닌가 보여진다. 고려에서 벼슬을 하고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합격한 것으로 보아 출중한 재주를 가진 분이지만 만년이 불우했다는 행적을 보아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는다.

이 시는 시인의 만년에 쓴 것으로 보이며 지난날을 뉘우치며 회환에 젖는 모습도 찾아내게 된다. 평생의 사업이 잘못된 것이라는 표현에서 그렇다. 그러면서 자신이 졸렬했음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엿본다.

화자가 가지고 있는 살림이란 건 별로 없다. 이사를 하는데 살림살이 물건이 없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는 대화의 상대는 없어 보이지만 누군가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자신에게 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성현의 책만이 한 수레임을 강조하며 위안을 삼는다.

최해는 고려시대의 문신이다. 경주 사람으로 최치원(崔致遠)의 후예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아홉 살에 시를 잘 지었고 장성하자 학문이 나날이 진보해 선배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학문을 토론할 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스승이나 당대 최고로 명망 높은 유학자라도 치열히 논쟁을 벌여 비판했으며 자신의 지론을 변함없이 지켰다. 이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사랑받거나 높이 대우받지 못하고 천거를 받을 때마다 배척을 받기도 했다.

1320년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 요양로개주판관(遼陽路蓋州判官'개주는 지금의 랴오닝성)이 되었으나 신병을 핑계로 5개월 만에 귀국했다. 성균관 대사성 등을 지냈으나 집이 가난하여 만년에는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고려 명현의 시문을 뽑은 '동인지문'(東人之文) 25권을 편수했다.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평생을 시주(詩酒)로 벗삼아 당대의 문호(文豪)로 문명을 떨쳤다. 문집에 '졸고천백'(拙藁千百), '농은집' 등이 있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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