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를 주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나라는 흔치 않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고추를 가루로 내거나 식초로 삭혀서 음식에 살짝 첨가하는 양념으로만 사용하는 데 비해 유독 우리나라는 고추전, 고추볶음 등 생고추 또는 말린 고추를 주재료로 음식을 만든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에 위치한 부탄도 고추요리만큼은 둘째 가라면 서러운 나라다. 부탄은 풋고추뿐만 아니라 말린 홍고추도 요리재료로 쓴다. 고추를 주재료로 쓴 부탄의 전통음식을 살펴보면 우리의 매운맛도 한식 세계화를 위한 또 하나의 경쟁력임을 알 수 있다.
◆부탄의 고추요리는 한국보다 한 수 위
인구 60만 명인 부탄은 국토 전체가 험준한 산악 지역이다. 그래서 주민들은 경북 영양처럼 고추농사를 많이 짓는다. 가뭄에 잘 견디는 고추는 물 빠짐이 좋은 산비탈 밭에 걸맞다. 늦가을을 맞은 부탄에는 햇볕에 고추를 말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건물 지붕마다 온통 붉은 고추가 널려 있다. 사람들 모습도 그렇지만 부탄은 우리의 전통적인 시골 가을 풍경과 정말 닮았다.
시퍼런 풋고추를 붉은 고추장에 푹 찍어 들고 웃는 한국인의 모습에 외국인들은 깜짝 놀란다. 밥상에 둘러앉아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쳐 가면서도 매운 고추를 즐겨 먹는 모습에는 아연실색한다. 우리와 비슷한 식성을 가진 부탄도 고추 자체로 음식을 만들어 외국인들을 놀라게 한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이마다찌'(Ema Datsi)이다. 쌀밥과 같이 먹는 이 음식은 영어로는 '칠리 앤 치즈 커리'(Chili and cheese curry)라고 하는 데 음식의 주재료는 매운 고추다.
"매콤한 이마다찌는 쌀밥과 참 잘 어울립니다. 외국에 나가면 항상 생각나게 하는 부탄 전통음식이지요." 비행기에서 만난 부탄인 쿤장 펠돈(30'여'공무원) 씨의 얘기에서 부탄 사람들의 식성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부탄 사람들이 즐겨 먹는 국민요리 이마다찌는 고추를 밀가루에 버무려 밥솥에 쪄낸 꽈리고추 무침과 비슷하다. 꽈리고추 무침은 보통 간장으로 간을 맞추지만 이마다찌는 소금으로 간을 하고 밀가루 대신 치즈에 버무린다. 풋고추나 홍고추 모두 재료로 쓴다. 마른 홍고추는 물에 불린 뒤 짓이겨서 재료로 사용한다. 어찌 보면 고추요리만큼은 부탄이 우리보다 한 수 위다.
"이마는 칠리라는 뜻이고 다찌가 치즈라는 뜻입니다. 이마다찌는 주로 쌀밥과 면에 비벼 먹습니다."부탄 전통음식 안내에 나선 부탄왕립예술학교 틴레이(56) 교장은 "이마다찌는 고추 맛을 기준으로 보통 4가지로 나눈다"고 했다. 아주 매운맛을 내는 인도산 고추를 쓴 것과 부탄산 풋고추를 재료로 한 적당히 매운 것, 말리지 않은 홍고추를 사용해 만든 것과 말린 홍고추를 이용한 것 등이다. 이 조리법은 전통 음식점에서도 메뉴로 구분돼 있다.
◆매운맛을 특화한 부탄 전통음식 이마다찌
틴레이 교장은 부탄의 수도 팀부시 시내 전통문화의 거리에 있는 커슨스(Cousdin's)라는 전통음식점으로 안내했다. "점심시간에 외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습니다. 모두 이마다찌와 비프파를 선택하지요." 주인 페마 초덴(32'여) 씨는 하루 평균 40~50명의 외국인 손님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좌석은 50석 정도. 그리 크지 않은 음식점에는 부탄 국왕 내외의 사진과 나무로 깎은 부탄 전통 채색 탈이 사방에 걸려 있다.
먼저 야채수프가 나왔다. 야채를 잘게 썰어 넣고 끓였다. 두부와 당근도 보인다. 그다음이 불그스레한 쌀밥인 레드라이스다. 4명이 함께 먹도록 큰 그릇에 담았다. '무무'라는 찐만두와 만두소스도 곁들였다. 다음으로 이마다찌가 차려진다. 말린 붉은 고추를 짓이겨서 물에 불린 다음 양념으로 생강과 마늘을 넣고 치즈로 졸여 낸 것이다. 양념이 잘 배어들 정도만 짓이겼을 뿐 거의 통고추 형태 그대로다. 고추에 웬만큼 단련된 한국인이지만 겁부터 난다.
"우선 야채수프부터 먹어 보세요. 그런 후에 이마다찌를 밥에다 조금 떠 얹어 먹어보고 양을 정하세요" 곁에서 빙그레 웃던 틴레이 교장이 덜 맵게 먹는 방법을 알려줬다. 원래는 이마다찌를 밥에 비벼 뭉쳐서 손으로 먹는다고 한다. 손가락 끝을 이용해 이마다찌를 덜어 밥알에 묻힌 다음 적당한 크기로 떼서 입 안에 넣는다. 그러나 요새는 포크와 숟가락을 이용한다. 젓가락은 쓰지 않는다.
붉은 고추 한점을 입에 넣었다. 건고추가 요리과정에서 물기를 머금어 쫄깃한 식감을 냈다. 밀가루에 버무려 낸 한국의 건고추찜과 식감이 흡사하다고 생각하는 찰나 입안에 불이 난 듯 매운맛이 작렬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금세 이마와 목덜미에 땀방울이 흘렀다. 그냥 입술을 뜯는 듯 맵기만 한 중국산 고추와는 맛이 다르다. 우리의 청량고추처럼 맛있는 매운맛이다.
페마 초덴 씨가 "매우면 시금치로 끓인 수프를 떠 먹으라"고 조언했다. 매운 음식에는 부드러운 바나나가 제격이다. 국물을 떠먹으니 얼얼하던 입안이 한결 덜하다. 바나나도 진정제 역할을 한다.
◆매운맛 삼총사-이마다찌, 샤컴파, 스큼파
이마다찌 이외에도 전통음식이 있지만 고추가 들어가지 않는 음식은 없다. 부탄 사람들은 예부터 고추농사를 많이 짓고, 고추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마다찌 다음으로 치는 음식이 '샤컴파'라는 소고기 고추구이와 '스큼파'라는 돼지고기 고추조림이다. 샤컴파와 스큼파는 이마다찌와 더불어 부탄의 3대 전통음식이다. 재료로 쓰는 고기는 모두 말려서 쓴다.
샤컴파와 스큼파를 주문하자 주인 페마 초덴 씨가 입술을 두드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베리 핫"(Very hot)이라고 말했다. "한국도 고추라면 1등"이라고 엄지를 펴 보이자 못 이기는 듯 주방으로 들어갔다. 고기는 겨울철 히말라야 산맥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으로 말린다. 틴레이 교장은 "샤컴파와 스큼파는 제대로 건조된 고기를 써야만 제 맛이 난다"고 했다. 돼지고기는 그늘에서 말리고, 소고기는 햇볕에 직접 말린다고.
육포구이처럼 검은빛을 띤 샤컴파는 바삭하게 구운 소고기에 말린 풋고추를 볶아 곁들였다. 식감이 바삭바삭하고 질기지 않아 구미를 당기게 한다. 고기와 고추의 고소한 맛이 어우러진다. 스큼바는 돼지고기를 껍질째 말려 파프리카와 시금치, 무 등 야채를 넣고 마늘과 생강으로 양념을 한 뒤 마른고추를 찢어 넣고 은근한 불에 졸여낸 음식이다. 돼지껍질은 물론 비계까지 쫄깃한 식감이 난다. 조림에 말린 고추를 쓰는 것은 안동찜닭 조리방식과 흡사하다. 돼지고기 특유의 구수한 맛도 그대로 살아 있다. 이외에도 양송이를 주재료로 야채와 고추를 추가해 머슈롬 치즈로 볶아 낸 '샤무다찌'라는 전통음식도 있다. 이 음식에도 고추가 예외 없이 들어 있다. 부탄김치라고 하는 '부탄헤이제'는 야채에다 중국 향채를 잘게 다져 넣고 소금간을 한 후 고추를 다지듯이 썰어 넣었다. 마치 곰탕에 넣어 먹는 양념 다대기 같다.
페마 초덴 씨는 "부탄을 찾은 외국인 손님 중 채식주의자와 젊은 층이 매운 음식을 찾아 먹는다"고 했다. 그는 "채식이 대개 자극이 없는 음식 위주이기 때문에 보다 자극적인 음식을 찾는 것 같다"며 "강한 자극을 즐기는 신세대들이라서 매운 음식을 일부러 즐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부탄 팀부에서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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