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人 세계In] <22>일본 '김치 전도사' 오영석 처가방 대표

日서 성공한 '영남고 농땡이'…배결은 퓨전 속의 '전통'

'김치전도사' 오영석'유향희 부부. 이들이 운영하는 도쿄의 김치박물관에는 매달 1천여 명 이상의 일본인들이 찾아온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지도, 성장하지도 않았다. 일본에서만 생활한 재일교포의 성공담이 전혀 아니었다. 팔공산 초입의 대구 동구 둔산동에서 태어나 영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것도 서른두 살의 늦은 나이에 무일푼으로 일본으로 건너간 한 경상도 남자의 성공담이다. '김치 전도사' 사이카보(妻家房) 오영석(61) 대표는 이를 '꼴찌의 귀환'이라고 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도 하지 않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며 돈 쓰는데 골몰했던 '농땡이'가 일본 전역에 28개의 한국 음식점과 17개의 김치 코너를 가진 성공한 사업가가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고 한다. 고교 동창들이 그를 가리켜 '개천에서 용났다'고 말할 정도로 파란만장한 성공 스토리였다.

▷도쿄에서 맛본 김치

도쿄 중심가 신주쿠 옆에 자리한 신오쿠보 지역은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거리다. 신오쿠보 대로의 한류백화점 뒤편 깔끔한 3층 건물이 바로 오 대표가 운영하는 사이카보 본점이다. 1층에는 김치박물관이 있고 2층은 식당, 3층은 사무실이었다. 김치박물관 규모는 전체 60평 정도로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사방 벽면에 '김치의 역사'와 '지역별 김치' '김치조리법' 등이 전시돼 김치의 모든 것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놓았다. 각종 김치 샘플과 큼직한 장독을 도쿄 한복판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이채로웠지만, 열린 주방을 통해 김치 담그는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큰 재미였다. 매달 학교, 단체 등에서 1천여 명이 찾아와 이곳을 둘러보고 가고, 일본 주부들을 대상으로 김치를 담그는 요리교실도 운영하고 있다.

"이곳을 찾은 일본인들은 일본의 기무치와 한국의 김치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알고 갑니다. 김치가 '식탁 위의 보물'이라고 할 만큼 훌륭한 음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죠. 저희는 일본인들에게 단순하게 김치를 파는 것이 아닙니다. 김치를 통해 한국문화를 알리는 것이죠."

그가 김치박물관을 구상하게 된 것은 사업 초창기인 1996년 고객들에게서 '김치가 상했다'는 항의를 받고 나서부터다. 깍두기에 깊은맛을 내기 위해 양파를 갈아 넣었는데 시각적으로 공기가 보글보글 올라오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가 고객들에게 '김치는 발효 식품'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었다. 반품을 요구하는 고객들 앞에서 깍두기를 한 움큼 집어서 맛나게 먹고 난 후에야 의심이 풀렸다. 그는 그때부터 단순하게 김치장사를 해서는 안 되고 한국김치를 제대로 이해시킬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오랜 구상을 거쳐 만든 것이 바로 '김치박물관'이었다. 결국 그의 성공 비결은 김치와 한국음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김치만 사고팔았다면 고작 가게 1, 2개를 갖고 있을 정도의 소규모 식당 주인에 그쳤을 것이리라.

2층 식당에서는 김치를 비롯해 제육볶음, 잡채, 된장찌개 등을 맛볼 수 있었는데 한국에서 먹던 것과 별다를 바 없었다. 대부분 한국에서 공수해온 식자재로 만들었으니 맛이 달라질 리 있겠는가. 그런데도 사이카보를 찾는 손님들의 90% 이상이 일본인이라고 한다. 식당 여기저기에서 일본말이 들려왔다. 이는 2000년대 초반부터 불기 시작한 한류의 영향이 크다고는 하지만, 한국음식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흐뭇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무일푼으로 일본에 건너오다

'막노동꾼, 춤 선생, 카세트테이프 판매원, 의상실 견습생, 의상실 주인….' 그가 일본에 건너오기 전 젊은 시절 거쳤던 직업이다. 그는 학창 시절을 '날건달'처럼 보냈다고 했다. 그가 기자에게 영남고 재학시절 수학여행 갔을 때의 사진을 보여줬는데, 친구들은 모두 교모 쓰고 검정색 교복을 입고 있는데, 그 혼자만 모자 없이 하얀색 바지만 입고 있는 게 아닌가. 흔히 말하는 '노는 아이'의 전형이었다. 그는 요즘 모교인 영남고에 장학금을 매년 내놓고 있는데 일명 '꼴찌 장학금'이다. 공부 잘하는 학생은 아예 배제하고 공부 못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이 그러했기에 공부 못하는 아이들에게 더 애착이 간다고 했다.

그가 뒤늦게 '철'이 든 것은 고교를 졸업하고 가세가 기울어지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다니던 대학을 중퇴하고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그래도 꿈은 있었어요. 최고의 패션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죠. 낮에는 재단 일을 배우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서울 명동에 의상점을 차리기도 했지만 제대로 되지 않아 제대로 된 패션기술을 배우려면 일본에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는 1983년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무일푼인데도 아내와 4살, 2살 난 두 딸을 데리고 '최고의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일본행 비행기를 탔다. 무모한 행동인듯했지만, 그것이 결국 인생을 바꾸게 됐다. 낮에는 도쿄의 문화복장학원에서 패션 유통을 공부하고 밤에는 식당에서 서빙을 했다. 졸업을 앞두고 게이오 백화점에서 연수를 했는데 그때 친분을 쌓은 여성복 담당 부장이 입사를 추천해줬다. 한국인으로는 일본 백화점업계의 첫 번째 입사자가 됐다.

1989년 일본으로 건너가 낳은 아들의 돌을 맞아 백화점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한 것이 음식사업에 뛰어드는 계기였다. 음식 솜씨 좋은 아내 유향희(62) 씨가 김치와 제육 보쌈, 잡채, 파전, 갈비찜 등으로 상을 차려놓았는데 이를 맛본 직원들은 '오이시'(맛있다)를 연발했다. 이에 자극받은 아내가 도쿄 요츠야에 김치와 젓갈을 파는 반찬가게를 열었고, 얼마후 게이오 백화점 김치 코너에 입점을 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 대한 이미지가 열악했는데도 이들 부부는 일본인 입맛에 맞춘 퓨전김치가 아니라 정통 한국 김치만을 고집했다. 조금씩 사업이 확장되면서 1995년 그는 백화점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김치사업을 키우기 시작했다.

▷경상도 부부의 합작품

사이카보, 즉 처가방이라고 상호를 붙인 것도 재미있다. 장모가 제일 맛있는 음식을 숨겨 두었다가 사위가 왔을 때 푸짐하고 정성스레 대접한다는 의미다. 그런 장모의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고 손님을 맞이하겠다는 것이다.

"아내 덕에 경상도 촌놈이 출세한 셈이죠. 지금의 사이카보를 만든 것도,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것도 아내 몫이 큽니다. 아내를 처음 만난 것이 대학교 1학년 때였는데 놀기 좋아하고 철없는 나를 탓하지 않고 지지해줬지요. 지금까지 내 곁에서 묵묵히 헌신하고 있지요." 그렇지만 아내 유향희 씨는 "남편의 빈틈없고 철두철미한 사업능력 때문에 이만큼 성공할 수 있었다"며 남편을 치켜세웠다. 그가 8년간 백화점에서 배운 유통기법을 사업에 활용하였기에 '김치 전도사'라는 명예로운 별명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몇 년 전 서울 청담동과 대구 현대백화점에 사이카보 한국 점을 냈다. 전통 일본 음식점이다. 일본에는 전통 한국음식점을, 한국에는 전통 일본음식점을 낸 것이다. 재미있는 발상이다.

"젊을 때는 패션으로 한일 교류를 이루고자 했는데 이제는 음식으로 양국의 문화교류를 이뤄내고 싶습니다. 어느 나라 음식으로든 어머니가 직접 차려 주시던 그 밥상처럼 손님들을 푸근하게 대접하고 싶어요."

일본 도쿄에서 글'사진 박병선기자 lala@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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