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이면 어김없이 산을 휘어 감는 구름을 본다. 산허리를 휘휘 감고 도는 구름은 화가에겐 멋진 화제가 되었으며, 시인에게는 좋은 글감이 되었다. 구름이 산허리를 감고 돌아 오랜만에 친구를 부둥켜안은 듯 감칠맛도 자아낸다. 자연과의 좋은 대화이자 속삭임이다. 이것이 시의 맛이자 시적 감흥이리라. 스님을 찾아가는 손님은, 스님이 묻혀 있는 구름을 쓸지 않았기에 구름을 송화(松花)가 만발했다고 표현하며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구름에 묻혔어도 스님은 쓸지 않고
지나던 손이 와서 가만히 문을 여니
온 산에 송화 만발하니 하마 늙지 않았을까.
寺在白雲中 白雲僧不掃
사재백운중 백운승부소
客來門始開 萬壑松花老
객래문시개 만학송화로
【한자와 어구】
寺: 절, 사찰/ 在: 있다/ 白雲中: 흰 구름 가운데 있다/ 白雲: 흰 구름/ 僧: 중, 스님/ 不掃: 쓸지 않는다/ 客來: 손님이 오다/ 門: 문/ 始開: 비로소 열다/ 萬壑: 일만 구렁, 곧 온 산/ 松花: 송화가 만발하다/ 老: 늙다, 곧 송홧가루가 흰색이니 늙은이의 머리카락으로 상상함.
'송화 꽃 만발하니 하마 머리 쇠었겠지'로 제목을 붙여본 오언절구다. 작자는 손곡(蓀谷) 이달(李達)로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이다.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벼슬길이 막힌 울분을 시문으로 달래며 제자 교육으로 여생을 보냈다. 말년엔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를 가르쳤으며, 허균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절집이라 구름에 묻혀 살기로/ 구름이라 스님은 쓸지 않았고/ 지나는 손이 와서야 문을 열어 살펴보니/ 온 산의 송화 꽃 만발하니 하마 쇠었겠지'라는 시상이다. 위 시제는 '불일암 인운 스님께 드린 글'로 번역된다.
백의는 우리 민족의 상징이었다. 그래서 백의민족이라고 했는지 모른다. 하얀 파도만 봐도 예사롭게 여기지 않았고, 아리랑 한 곡만 들어도 순백한 민족혼과 함께 흰색을 연상하며 민족의 대동단결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암자에서 수도에 정진하고 있는 스님을 찾아간 계절은 한겨울이었다. 그는 온 산이 하얀 천을 깔아놓은 듯 소복하게 눈으로 덮여 있는 시적 배경 속에 흰 구름도 흰 눈으로, 흰 눈도 떠가는 흰 구름으로 착각하게 되는 멋진 착상을 연상하면서 시상을 전개한다.
날마다 스쳐 지나가는 구름을 스님이 비를 들고 쓸 리 없다. 아침에 소복하게 내린 눈을 스님이 쓸지 않았던 것은 아마 흰 구름으로 착각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생각하지만, 봄이면 어김없이 날리는 흰 송홧가루로 착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노스님의 머리가 희어진 것도 이런 원인에서 찾는 시적 화자의 기발한 착상도 만난다.
이달은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시인이다.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이며, 동리(東里)'서담(西潭)이라고도 한다. 충청남도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이수함과 관기 사이에서 태어났다.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벼슬길이 막힌 울분을 시문(詩文)으로 달래며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손곡리(蓀谷里)에 은거해 호를 손곡이라 했다. 허균은 스승의 전기로 '손곡산인전'(蓀谷山人傳)을 집필했다.
한시의 대가로 문장과 시에 능하고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에 힘써 이백(李白)과 성당십이가(盛唐十二家)의 작품들을 모두 외울 정도였다. 시문에 뛰어난 정사룡과 박순 등의 문인(門人)으로, 특히 당시풍(唐詩風)의 시를 잘 지어 '삼당파' 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사화(士禍)와 당쟁, 임진왜란 등의 전란으로 어수선한 시대적 상황과 신분적 불만까지 겹쳐 젊은 시절의 시 세계는 주로 방랑과 이별, 슬픔 등 인간 감정의 자연스러운 발로를 중시하는 당풍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불우한 자신의 처지를 시적으로 승화시켜 초월의 경지를 보여주는 '산사'(山寺), '강행'(江行)과 같은 명시를 남겼다. 당시 서민들의 누추한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습수요'(拾穗謠) 등의 정감어린 시는 오늘날에도 공감을 얻고 있다. 저서에 문집 '손곡시집'(蓀谷詩集)이 전한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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