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지금 시니어 시프트(senior shift) 중이었다. 소비시장이 노인 고객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가고 있었다. 백금(白金)세대라 불리는 은퇴자들이 시장의 성장을 좌지우지할 만큼 영향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이다.
10년 전, 일본업계는 실버산업의 성장을 목전에 둔 듯 부풀었다. 일본 가계 금융자산의 60%인 900조엔을 갖고 있는 단카이세대들이 은퇴를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산이 많은 그들이 은퇴하면 실버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리라는 장밋빛 꿈을 꾸고 있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은퇴자들은 덜 쓰고 심지어 아예 구매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비를 6% 줄였다. 일본 업계는 뒤늦게 그들의 소비패턴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노인세대의 소비 형태는 자산보유와 무관하며 현재 소득에 비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쟁여둔 돈보다 가처분소득만 소비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시장실패 후 일본업계는 보다 더 진지해졌다. 자세를 낮추고 노인들의 눈높이에 맞추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은퇴자들의 주머니만 노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했고 이웃처럼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애썼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노인을 유혹하는 다이신백화점
동백기름, 돼지털로 만든 칫솔, 수백 가지의 젓갈, 세상의 모든 상품이 다 있는 곳. 30년 단골이 수두룩한 상점. 500엔 도시락을 직원이 집으로 배달해주는 백화점….
도쿄의 남쪽 외곽지인 오타(大田)구 오모리역 부근에 있는 다이신 백화점. 슈퍼마켓 같은 외형을 한 이 백화점은 노인전용백화점을 표방한 이후 승승장구하고 있다. 주변의 화려한 대형백화점을 제치고 오타구에서 매출 1위를 8년째 고수하고 있다.
지하철 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다이신백화점은 5층의 소박한 모습이었다. 오전임에도 수백 대의 자전거가 이미 주차되어 있었고, 노인 주차요원 3명이 끊임없이 몰려드는 차량의 진입을 유도하고 있었다.
입구에는 노인들이 좋아하는 왕년의 유명가수 초청 디너쇼가 열린다는 포스터가 커다랗게 붙어 있었고 그 옆에는 지역민이 참가하는 사과 세미나 안내문이 있었다.
1층 식품매장은 노인들로 붐볐다. 진열대는 아주 낮아 키가 작은 노인들도 높은 곳에 있는 물건을 쉽게 잡을 수 있었다. 식품코너는 소포장이 많았고 매장 곳곳에 의자를 놓아 쇼핑하다 힘들면 앉아 쉴 수 있도록 했다. 2층 잡화코너 3층 가구코너도 화려하지는 않지만 실용적인 상품들로 채워져 있었다.
니시야마 히로시 사장은 "고객들에게 친밀감을 주고 지역민과 함께하는 백화점을 운영하는 것이 목표다. 또 이곳에 오면 뭐든지 있다는 안도감을 주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백화점 500m 반경에 있는 주민은 모두가 단골이라고 자랑했다.
◆할머니들의 패션1번지 스가모시장
도쿄 북쪽 스가모역 부근 스가모시장은 할머니들의 천국이었다. 노인물건을 취급하는 상가만 해도 200곳이 넘었다. 상가에 진열돼 있는 옷이나 모자 심지어 지팡이조차 모두 고령자를 위한 것이었다. 음식도 할머니들이 좋아하는 모찌들이 즐비했고 옛날 과자도 300엔(약 3천300원)이면 한 봉지 가득했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상점은 빨간 팬티가게. 전국적으로 알려져 유명세를 타고 있다. 빨간색이 노인들의 기를 불어넣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 가게는 아예 빨간 색깔 물건만 팔고 있다. 구니코(80) 씨는 "이곳 시장은 가격이 저렴해 백화점의 3분 1가격이면 물건을 살 수 있다. 추억의 음식도 많아 옛날로 돌아간 듯 마음이 편해진다"며 환하게 웃었다.
스가모시장이 노인 패션1번지가 된 이유는 시장 인근에 있는 에도 시대(1596년)에 세워진 '도게누키 지죠 고간지'(高岩寺라)라는 유명한 절 때문이다. 예로부터 질병을 없애고 건강을 기원해준다는 곳으로 소문이 나면서 노인이 많이 몰렸다. 상인들은 여기에 주목해 노인들이 좋아할 품목을 앞자리에 배치하고 노인 상픔만을 취급하면서 노인시장으로 이름을 알리게 됐다.
미츠미야 상점가 진흥조합 관계자는 "스가모역 주변 상가들은 몇 년 새 매출이 하락세를 보이고 있지만 이곳은 최근 5년간 매출이 15%나 상승했다"며 "스가모시장은 천천히 구경하며 쇼핑을 즐기는 분위기를 이어갈 것"이라고 했다.
◆편의점이 달라졌어요
편의점은 젊은이들만 찾는다는 고정관념이 깨지고 있었다. 편의점을 찾은 한 할아버지는 "집 옆에서 24시간 불을 켜고 있는 편의점이 이렇게 이름값을 할 줄 몰랐다"고 했다.
연간 매출액이 6조엔에 달하는 일본 편의점의 시니어시장. 외곽지에 대형 유통매장이 생기면서 동네 상점이 사라지자 물건 구입이 어려운 노인들이 이웃 편의점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맞춰 대형유통회사들은 고령자식품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노인들이 쉽게 먹을 수 있는 고기찜 생선구이 조림을 편의점 상품으로 개발했다. 또 고혈압 당뇨 등을 고려해 염분을 줄이면서 입맛을 당기는 상품개발을 위해 시니어 특별전략팀까지 구성했다.
도쿄에 있는 편의점 로손에서는 최근 출입문을 넓히고 상품진열대를 낮추었다. 휠체어를 탄 채로 편의점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은 도시주변 마을을 도는 '이동편의점'을 운영, 노인고객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트럭에 물건을 싣고 외곽지 마을을 돌며 시장 가기 힘든 고령자들을 위해 물건을 팔고 있었다.
◇ 취재후기=일본은 우리의 미래다. 실버산업의 실패를 맞본 그들은 철저히 공급자 중심에서 소비자 중심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식품 코너에 쉴 수 있는 의자를 놓고 진열대를 낮추며 옛날부터 오랫동안 눈과 손에 익었던 상품으로 진열대를 꾸몄다. 편의점은 움직이기 어려운 노인들을 고려해 지역의 구멍가게를 자처하고 있었다. 4명 중 한 명이 노인인 일본에서는 노인을 타깃으로 하는 백화점이나 시장이 지역의 다른 대형백화점이나 상가의 성장률을 앞지르고 있다. 그것은 철저하게 노인들의 삶을 이해하려는 진지함이 있었기에 가능한 듯했다.
일본 도쿄에서 글'사진 김순재 객원기자 sjkimforce@naver.com
댓글 많은 뉴스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
'탄핵안 줄기각'에 민주 "예상 못했다…인용 가능성 높게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