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미국의 존재를 처음 알려준 나라는 중국이었다. 영국과의 아편전쟁(1840~1842년) 이후 쏟아져 나온 청나라의 지리서들은 '미리견국'(彌利堅國)이나 '미리견합중국'(米利堅合衆國)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미국을 소개했다. 당시 미국은 '부강하면서도 공평한 나라'로 묘사됐다. 그 이유로는 영국 오랑캐(英夷)와는 달리 '소국을 능멸하지 않는 나라'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와 미국 등 서구 열강이 한반도를 두고 각축전을 벌이던 모습은 오늘날과 다를 바 없다. 당시 중국의 선각자로 꼽히던 황준헌은 외교관으로 일본에서 4년, 미국에서 3년을 일했다. 1880년 조선의 수신사 김홍집이 황준헌에게서 받아 온 것이 '조선책략'이었다. 황준헌은 이 책에서 조선이 러시아에 맞서기 위해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할 것을 조언했다. 조선이 살아남으려면 중국을 어버이처럼 모시고, 일본과도 연대하며, 미국과는 조약을 체결하여 우방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우연의 일치일는지 모르나 고종은 1882년 비밀리에 조미통상조약을 체결해 조선책략에 힘을 싣는 모습을 보였다. 황준헌의 조선책략과 '친중 결일 연미' 구호는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책략'이 이에 걸맞은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의문이다. 뒷날 조선을 집어삼킨 것은 러시아가 아닌 일본이었다. '소국을 능멸하지 않는 나라'라던 미국은 결정적인 순간에 상호 조약국이란 조선의 믿음을 저버리고 일본을 택했다.
중국이 이어도를 포함한 그들의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후 우리나라가 다시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중국은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그었다. 일본은 주변국 여론에 아랑곳없이 집단 자위권을 행사하겠다며 군사 대국화의 길을 걷고 있다. 미국 또한 일본의 집단 자위권 행사를 반기며 일본 손을 들어줬다. 이어도를 포함한 우리 방공식별구역을 다시 선포하겠다던 한국은 미국의 부정적 기류를 감지한 후 어정쩡한 태도로 돌아섰다.
한반도를 둘러싼 상황은 130여 년 전 조선책략이 나온 시기와 달라진 것이 없다. 조선책략은 조선이 강대국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통해 힘의 균형을 만들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스스로 힘이 없는 책략만으로는 희생물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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