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드라마를 즐겨보는 편이다. 더러는 드라마를 삼류문화쯤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런 결벽증은 가지고 있지 않다. 읽고 싶은 책이 있듯이 보고 싶은 영화와 즐겨 보는 드라마가 있을 뿐이다. 요즘은 '응답하라 1994'가 재미있다. 얼마나 재미있는지 금요일 저녁에 밥 먹자는 친구가 있으면 어느 쪽을 택해야 하나 살짝 고민스럽다.
제목처럼 드라마는 20년 전 지방에서 갓 상경한 대학 신입생 촌놈들의 이야기다. 원조 사투리에 삐삐와 카세트테이프와 최루탄이 등장한다. 세계화를 외치는 지방 출신 대통령은 '관광도시'를 '강간도시'로 발음하고, 드라마 주인공은 "리더스 다이제스트 하나 주세요"를 매끈하게 서울 말씨로 꾸미다가 "주리(거스름돈)는 됐어요"로 산통을 깨는 장면을 연출한다. 스무 살 청춘의 풋풋한 모습들이다.
나의 스무 살은 장발과 미니스커트로 요약된다. 남자의 머리는 길어지고, 여자의 치마는 짧아졌다. 어른들은 언성을 높여 말세(末世)를 탄식했고, 거리에서는 단속 경찰이 젊은이들과 숨바꼭질을 했다. 내가 다닌 대학의 신부(神父) 총장은 미니스커트와 하이힐이 보기 싫어 운동장에 자갈을 깔아버렸다.
나의 청춘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이었다. 나는 나의 청춘이 낡고 비루한 가치에 의해 훼손되는 것에 절망했다. 나는 빛나고 손에 닿지 않는 그 무엇을 꿈꾸었다. 용기있는 친구들은 바다를 건너거나 감옥을 선택했다. 비겁한 나는 밤에는 한숨 쉬고, 낮에는 자책했다.
그 시절 우리의 공동 관심사는 김형석과 이어령과 유치환이었다. 더러는 김형석에, 더러는 이어령에 중독되었다.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보낸 편지를 두고는 남녀불문 늦은 밤까지 언쟁이 끊이지 않았다. 하품하던 막걸리집 주인이 문을 닫고 들어간 뒤에도, 우리는 팔다 남은 꽁치를 구워먹으며 소리를 질러댔다.
2013년 오늘, '1994'의 주인공들은 말쑥한 중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숙명 같은 사투리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푸른 집에는 단정한 표준말에 외국어까지 구사하는 여성 대통령이 입성했고, 아내들은 스마트폰으로 지구 반대편에 출장 가 있는 남편의 안부를 챙길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진화했고 편리해졌다. 한 번씩, 문득, 가시처럼 목에 걸리는 의문을 빼고는. 이것이 정녕 내가 추구했던 나의 모습일까. 잃은 것은 없을까. 빼앗기거나 놓친 것은 없을까.
청춘일 때는 청춘인 줄도 모르고 허둥대기만 했던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이제 2013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달력 한 장이 '아듀'를 고하려 한다.
소진/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giok04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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