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진신사리(眞身舍利)

지난달 24일 팔공총림 동화사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진신사리 이운식'이 봉행됐다. 현재 복원 불사 중인 비슬산 대견사에 봉안하기 위해 스리랑카에서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온 것이다. 이는 동화사 주지 성문 스님이 불교국가인 스리랑카를 직접 방문해, 스리랑카 정부와 진신사리 기증을 협의하여 이루어낸 값진 결과이다.

사리(舍利)는 범어의 '사리라'를 소리 나는 대로 한자로 옮겨 적은 것으로, 부처나 성자(聖者)의 유골, 시신 화장 후 유골에서 추려내는 작은 구슬 모양의 결정체 등을 의미한다. '열반경'에 의하면 석가모니 입멸(入滅) 후 다비(茶毘)를 치르고 8곡4두(八斛四斗)의 유골을 수습하여 8개 국가가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바로 이 석가모니에서 나온 사리를 '진신사리'라 하며, 이것이 바로 불교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사리이다.

사리는 불교 전래의 경로를 따라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졌는데, 한국불교에 사리가 전해진 첫 기록은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다. '진흥왕 10년(549) 양(梁)나라는 신라 유학 승 각덕(覺德)이 귀국하는 길에 사신 심호(沈湖)를 동행케 하여, 불사리(佛舍利)를 보내오므로 왕이 백관과 함께 흥륜사(興輪寺) 앞길에 나가 맞아들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576년에 안홍(安弘)이 중국 진(陳)나라에서 불사리를 갖고 돌아와 봉안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타난다.

조선 말기에 방산 허훈(舫山 許薰)이 지은 '금당탑기'(金堂塔記)에 의하면 '중국에서 들여온 사리는 신라 진평왕 4년(582) 대구 동화사에 1천200과가 안치됐고, 863년 경문왕이 석탑을 세워 다시 봉안했다. 이어 이 탑은 876년 지금의 동화사 금당선원 앞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당시 경문왕이 봉안한 불사리를 담았던 사리구가 1958년에 발견돼 '민애대왕 사리호'로 불리고 있다.

필자의 견해로는 앞선 두 사리가 중국으로부터 들여는 왔지만 봉안처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문헌상으로는 동화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진신사리 봉안 사찰이라 간주할 수 있다. 선덕여왕 12년(643) 자장율사가 통도사에 봉안한 사리보다 동화사 봉안이 61년 앞선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태종은 셋째 아들인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명나라의 승인을 얻는 대가로 전국의 진신사리를 모아서 명나라에 상납하는 사건이 있었다. 또한 임진왜란 등에 의한 수난으로 우리 국토의 진신사리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나 동화사 등의 전국 각 사찰 어딘가에 우리가 모르는 진신사리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으리라 본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리 봉안 성지인 팔공산 동화사, 달성군 옥포의 용연사 적멸보궁, 새롭게 진신사리를 봉안하게 된 비슬산 대견사, 이와 같이 진신사리 성지를 3곳이나 품게 된 대구는 기꺼이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이며, 그 미래 또한 복된 서광으로 충만하리니….

지거 스님/ 청도 용천사 주지'동화사 부주지 yong1004w@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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