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초 미국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야구는 한국에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구기종목이다. 올해 프로야구 시청률은 정규시즌 평균 0.86%(케이블채널 기준)로 프로축구(0.35%)의 두 배가 넘었다. 한국시리즈 시청률은 1차전 8.8%를 시작으로 2차전 11.6%, 6차전 12.5%, 최종 7차전 14%에 이르러 인기 예능프로그램(MBC 무한도전 14.3%'11월 4주차)에 육박했다.
특히 대구는 경북고'대구상고(현 상원고) 등이 1960, 70년대부터 고교 야구의 전국 정상권을 유지해온데다 삼성 라이온즈가 프로야구 최초로 3년 연속 통합 우승을 달성하는 성과를 거두면서 확실한 '야도'(野都)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야구 도시의 전통이 1899년 미국 선교사에 의해 전국에서 처음 시작됐다는 기록(본지 12월 6일 자 2면 보도)이 발견돼 눈길을 끌고 있다.
◆선교사 브루엔, 대구에 야구를 가르치다
우리나라 야구는 1904년 또는 1905년 미국 선교사 필립 질레트에 의해 처음 도입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황성기독청년회(YMCA) 활동에 청년들을 끌어들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런 사연은 영화 'YMCA야구단'에 잘 소개돼 있다.
하지만 김중순(59) 계명대 한국문화정보학과 교수가 번역해 이달 말 출간 예정인 '40 years in Korea'(한국에서의 40년)에는 이 같은 기존 상식을 뒤엎는 기록이 나온다. 책의 원본은 대구 남산교회를 설립하는 등 구한말 대구경북에서 활발한 선교'봉사활동을 펼쳤던 미국 선교사 헨리 M. 브루엔(1874~1959)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클라라 브루엔이 남편의 편지글 등 기록을 정리해 1970년대 미국에서 펴냈다.
야구 전파와 관련된 기록은 한국 이름이 '부해리'(夫海利)였던 브루엔 선교사의 편지와 주변 인물이 남긴 글 곳곳에서 확인된다. 브루엔이 1899년 10월, 당시 약혼자였던 첫 부인 마사(Martha)에게 쓴 편지(원본 25, 26쪽)에는 일본을 거쳐 한국에 부임하는 과정과 야구 용구를 가져왔다는 내용이 있다. '우리는 고베에서 시모노세키까지 작은 화물선을 타고 내륙의 바다를 지나갔는데 여러 개의 예쁘고 작은 섬들을 거쳐서 지나갔소. 거기서부터 우리는 부산으로 가는 해협을 지났는데, 거친 바닷길이었소. 우리 '대구' 선교사들은 서울에서 열리는 선교 연회에 참가 중이었소. 그래서 나는 호주 선교사 브라운 양에게 짐을 부탁했소. 해외선교부에서 추천한 장비 외에도 텐트, 천으로 된 접는 의자와 간이침대, 총과 탄약, 낚싯대와 낚시도구, 그리고 방망이, 공, 마스크, 글러브 같은 야구 장비들, 테니스 라켓과 공, 캠프용 취사도구, 랜턴을 구입했고 빅터 제품인 축음기, 카메라, 삼각대, 로체스터 램프, 정수기, 자전거, 그리고 캔버스보트를 가져왔소.'
또 1900년 1월 31일 그가 대구에서 마사에게 쓴 편지(원본 40쪽)에는 설날 풍경 묘사와 함께 야구를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오늘은 큰 연휴였소. 한국의 설날, 봄이 시작되는 첫날이라오. 모든 일이 멈췄소. 사람들은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자기 조상께 제사를 지내고 서로 방문하여 인사를 나누고, 놀기도 하고 먹기도 한다오. 우리는 하인들 모두에게 아침 식사를 마친 후 하루간의 휴일을 주었고, 11시쯤에는 산책을 나섰다오.(어린아이들이 뒤를 따라와) 집에 오니 6명 또는 10명 정도가 더 있어서 테니스 라켓과 볼을 가지고 야구를 가르쳤다오. 그들은 한 사람씩 번갈아 가며 공을 치고 나는 공을 잡고 감독을 했지요.'
특히 대구 동산병원 설립자인 우드브릿지 존슨 박사의 부인인 존슨 여사가 같은 해 3월 25일 쓴 '브루엔의 야구'라는 글(원본 46쪽)에는 '소년야구단을 시작했으니 한국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일이었습니다'라는 대목이 있어 눈길을 끈다. 존슨 여사는 이 글에서 '브루엔이 대구에 처음 왔던 것은 미국에서 막 도착했을 때였으니 아직 한국말도 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린 소년들에게 야구를 가르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소년들은 방망이로 공을 치는 데 버거워했습니다. 그래도 아이들이 기가 꺾이지 않도록, 아이들이 방망이를 쓰는 데 몇 가지 기술을 익힐 때까지 방망이 대신 테니스 라켓으로 대체하기도 했습니다'라고 적었다.
'대구남산교회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후원으로 책의 번역'역주 작업을 마친 김 교수는 "브루엔 목사가 처음 야구를 가르친 이들 가운데에는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최연소자였던 대구 출신 이갑성(1889~1981)과 김주호, 김학철 등이 포함돼 있다"며 "이갑성이 14세 때 브루엔 선교사를 만나 야구를 배웠다는 사실도 새로 밝혀진 내용"이라고 말했다.
◆브루엔 선교사는 누구?
헨리 M. 브루엔 선교사는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로 파견되어 대구에서 1899년부터 1941년까지 활동했다. 원본 책의 저자인 클라라 브루엔은 1924년 5월부터 1941년 11월까지 18년간 대구 동산병원의 간호과장으로 근무했다. 브루엔의 첫 번째 부인이 숨진 뒤 1934년 그와 결혼했다.
클라라는 1970년대에 펴낸 원본(발행일 미상'A4 600장 분량) 서문에서 브루엔 선교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내가 애틀랜타에 살고 있던 1970년이었다. 내가 수년 동안 간호부서의 책임자로 있었던 대구 동산병원 출신이라는 한국 여성과 만났다. 이 젊은 여성은 한국 사람들과 병원의 관계자들이 부 목사(브루엔의 한국 이름 부해리를 의미)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가장 많이 들었다고 했다. 특히 그가 시골에 선교 여행을 갔다가 병원을 방문하면 크게 환영을 받았고, 채플에서 설교를 할 때도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다고 했다.'
책 서문에 따르면 헨리 브루엔은 미국 뉴저지 서밋에 있는 중앙장로교회의 초대 목사였던 제임스 드하트 브루엔의 둘째 아들로 1874년 태어났다. 역시 목사였던 할아버지, 제임스 맥호터 브루엔이 작고한 뒤 할머니 안나 밀러 브루엔도 이들 가족과 함께 살았는데 할머니는 유명한 성서학자이자 교육자였다.
헨리 브루엔은 1896년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했다. 목사가 되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 들어가 1899년에 졸업했다. 그해 봄에 목사 안수를 받았고 미국 장로회의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파송 명령을 받았다. 1898년 제일교회, 1906년 계성학교를 각각 설립한 제임스 E. 아담스(한국명 안의와'1867~1929) 목사와 동산병원 초대 원장인 우드브릿지 존슨(한국명 장인차'1869~1951) 박사는 당시 대구에서 선교 업무를 시작하고 있었다. 헨리 브루엔과 이들이 대구 선교의 창시자라고 클라라 브루엔은 기록하고 있다.
책을 편역한 김 교수는 "한국 선교사뿐만 아니라 대구경북 개신교 역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자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워낙 분량이 방대해 연구자들의 접근이 수월하지 않았다"며 "클라라 여사가 남편의 유고를 정리하는 형식으로 여러 자료를 모았지만 편집까지 손을 대는 바람에 번역에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소개했다.
한편 헨리 브루엔의 편지 일부는 현재 대구근대역사관(대구 중구 포정동)에 보관돼 있다. 이진현 근대역사관 학예연구사는 "박물관 소장본은 알래스카에 가 있던 큰딸에게 브루엔이 보낸 편지로 '40 years in Korea'에는 소개돼 있지 않다"며 "전문 번역업체에 의뢰해 내년에 특별기획전을 열 예정"이라고 전했다.
◆대구 야구의 역사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된 야구는 '황성YMCA야구단' 이후 점차 확산되기 시작했다. 대구에서는 1912년 계성학교 교사들과 학생들이 벌인 경기가 첫 시합으로 전해진다. 대구의 첫 공식 야구경기는 1914년 7월 말 치러졌다. 동경유학생 야구팀이 대구를 방문, 대구의 청년단과 경기를 벌인 것이다. 1920년에는 대구청년회가 결성됐고 여기에 야구부가 만들어져 원정경기를 다니며 야구 보급의 주역이 됐다. 그해 가을 경남 마산으로 원정을 간 대구청년회팀은 일본인들이 많이 살아 야구가 일찍 보급된 마산팀을 맞아 7대 2, 17대 2로 대승을 거두기도 했다.
1922년에는 대구의 첫 야구대회가 열렸다. 참가팀은 대구고보, 희도학교, 해성학교 등 7개 팀이었다. '경북체육사'는 "부민들의 야구에 대한 관심이 대단해 오전 9시가 못 돼 동운정 야구장은 초만원을 이뤘다. 학교, 단체마다 꽹과리, 징을 든 응원단의 치열한 응원전이 펼쳐졌다. 해성학교는 1회전에서 희도학교를 19대 16으로 이긴 뒤 성진단, 광진단을 차례로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야구협회가 그의 이름을 딴 타격상을 제정할 만큼 '영원한 야구왕'으로 불리는 이영민도 계성학교 출신이었다. 1924년 서울 배재고로 옮겨가 야구선수 '스카우트 1호'를 기록한 그는 그해 전조선야구대회에서 주전으로 활약해 우승했다. 특히 이어 벌어진 전조선축구대회에서도 오른쪽 공격수로 출전, 우승을 이끌 정도로 축구와 육상에서도 발군의 기량을 뽐낸 만능 플레이어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계성학교 외에 대구고보, 대구상업에서도 학생들끼리 야구부를 조직해 중학교 팀이 7개였고, 소학교 팀도 10개나 됐다. 1930년대에는 대구전매국, 경북도청, 대구부청, 남선전기 등 직장야구단이 정기적으로 경기를 벌이며 야구 열기를 이끌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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