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대 이어 친일로 변절했다 삶 마감한 윤치호

'최남선은 한때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그는 연령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애국자라고 자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암적인 존재로 전락했다''' 일본인들은 그를 위해 1만 원을 들여 집 한 채를 짓고 있다.'

독립협회 회장과 대성학교장을 지냈고 항일활동을 하다 친일로 변절해 총독부 입장을 대변하는 신문에 일본제국주의를 찬양하고 조선 젊은이들의 중일전쟁 자원입대를 호소했고 그 공로로 일본 제국의회의 칙선 귀족원 의원을 지낸 윤치호(尹致昊)가 남긴 일기장 내용이다. 1865년 태어나 조국 광복 후 1945년 오늘 사망한 그는 아버지 윤웅렬(尹雄烈)에 이어 친일의 길을 걸었다.

일찍 일본으로 건너가 신학문을 익히고 유길준 등 개화파 인사들과 만나 조선의 개화에 나섰다. 1884년 갑신정변 이후 상하이로 유학하여 선교사들 영향으로 기독교인이 됐다. 또 선교사 앨런의 주선으로 미국 대학에서 5년간 공부했고 기독교를 통한 조선의 문명화를 바랐다. 1897년 독립협회에 가입, 이듬해 협회장으로 자주 국권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윤치호를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공화국을 설립하려 한다'는 소문으로 고종은 독립협회 임원 체포령을 내렸고 독립협회를 통한 개화운동은 막을 내리게 됐다. 애국 계몽운동을 벌였던 그는 1911년 '105인 사건'으로 감옥 신세를 졌고 출소 뒤 친일파의 길을 걸었다. 그는 1883년부터 1943년까지 거의 60년 동안 대부분 영어로 된 일기도 남겼다.

정인열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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