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사필귀정]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

서양의 중세 시대를 발전이 거의 없었던 '암흑기'로 규정하고 있으나 최근에는 역사가들이 반론을 제기한다. 로마 제국이 해체된 후 르네상스가 발현하기까지 약 1천 년간에 해당하는 이 시대 역시 나름대로 활기차고 자그마한 진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살기에 고달팠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국가가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해주며 삶의 여유를 즐길 수 있었던 로마 제국 시절의 풍요로움이 사라졌고 봉건 영주의 최소한 보호에 의지해 살아야 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바빴던 사람들은 현세보다는 내세를 갈망했고 그것이 '희망'이었다. 기독교적 가치관이 삶을 지배하면서 신에 대해 토론하다 보니 신학이 꽃을 피웠다. 중세 시대의 대표적 인물인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등은 신학자였다.

사람들이 생존의 고투에 시달리면서도 삶을 이어가는 힘은 이처럼 '희망'에 있다. 중세 시대처럼 내세가 아니라 발을 딛고 사는 바로 이 땅 위에서, 세속의 삶에서 희망을 얻길 바란다. 최근 전 세계인들의 추모 속에 영면한 넬슨 만델라의 위대함도 희망을 열었다는 데 있다. 만델라는 인종 차별이 극심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암흑기를 헤쳐오면서 27년간 수형 생활을 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용서와 화해를 통해 질곡의 역사를 끝냈다. 그가 흑인과 백인이 공존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하면서 남아공은 과거와 단절할 수 있었다.

사람이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 어느 국가를 막론하고 보편적으로 적용되며 2013년 대한민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희망을 품는 데에는 정치가 큰 영향을 미친다. 정권이 바뀌더라도 정치가 평범한 사람들, 서민들에게 살아갈 힘을 안겨야 한다. 다양한 계층의 이해관계를 조화시키고 잘사는 사람들이 계속 잘살게 하는 것은 물론 못사는 사람들이 더 잘살 수 있도록 힘을 기울이면서 국가와 국민이 미래에도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요체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바로 여기에 초점을 맞춰 집권할 수 있었다. '경제 민주화'는 대기업 위주의 경제 질서를 재편해 중소기업과 자영업자에게도 살아갈 힘을 주자는 것이었고 '복지 확대'는 빈곤층의 삶의 질을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리자는 것이었다. '반값 등록금' 정책은 과중한 학자금 부담에 시달리는 대학생들과 그 부모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됐고 일자리 정책은 극심한 취업난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불과 집권 10개월 만에 대부분의 국정 청사진이 빛바래고 있다. '경제 민주화'는 일감 몰아주기 방지법 등 최소한의 성과에 머물며 후퇴하고 있고 '복지 확대'는 기초연금제 개편 등 수정된 방향으로 주저앉았다. '반값 등록금' 정책은 내년 예산에 반영되지 않아 유명무실하게 됐으며 일자리 정책은 내실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박 대통령이 애초에 내걸었던 이러한 정책들은 사실 용기를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보수를 표방하면서도 진보의 의제들을 취했던 만큼 기득권 중심의 질서를 흔들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기업 등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뚜렷한 이유 없이 물러났고 너무나도 익숙한 예전의 틀 속으로 되돌아갔다. 박 대통령이 제시했던 공약에 진정성이 담겨 있었느냐 하는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게다가 박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국가 기관의 개입 의혹이 계속 터지는데도 야당이 요구하는 해결 방안을 외면하고 있다. '분열' '엄단' '묵과하지 않을 것' 등의 살벌한 표현이 들어간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의 대선 도전을 도왔던 김종인, 이상돈 씨 등이 떠났고 최근에는 이준석, 손수조 씨 등 젊은 조력자들도 등을 돌리고 있다.

박근혜정부는 1년 차 임기를 시작했을 뿐인데도 처음과는 다르게 많이 변하고 있다. '가면'을 벗어던지고 '본색'을 드러냈다는 비판도 낯설지 않다. 국정 동력이 가장 왕성한 시간을 허비하면서 경제 활성화 등 변모한 정책 추진조차 지지부진하다. 정쟁이 가열되는 상황 속에서 정쟁을 조장하는 듯한 느낌도 있다. 이를 지켜보는 많은 국민의 가슴 속에는 희망이 사라지고 절망감이 싹트고 있다. 아직 4년 넘게 남았는데 나아질 가망이 없으니 희망을 다시 품기도 쉽지 않게 돼 그게 더욱 절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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