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돔 8.8㎏짜리 한 마리를 잡았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낚시로 잡은 것은 아니다. 서해 변산반도 옆 격포항 어시장 수족관 속에서 '혹시 살아나갈 수는 없을까'를 궁리하고 있는 놈을 때려잡았다. '가망 없는 꿈은 빨리 접는 게 낫다'는 걸 돔에게 가르쳐 줄 겸 맛있는 회를 푸짐하게 먹을 겸 그래서 잡았다.
그 돔은 서해에서 한 토막 갯지렁이 미끼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낚싯바늘에 걸려 주민등록을 수족관으로 옮긴 대물이었다. 마침 우리 여행도반들의 가을축제 기간 중에 딱 걸려 이승을 하직하는 불운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크기와 맛의 보시가 우리들 가슴속에 오래도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겨두고 떠났으니 그렇게 애달파 할 일만은 아니다.
가게 앞 길거리에서 봐도 엄청 큰놈이었다. "저 큰 고기는 몇 ㎏이나 나가요. 값은 얼맙니까." 칼질하기 바쁜 주인은 힐끗 한 번 쳐다보더니 '너희들이 감히 저걸 산단 말인가'투의 얕잡아 보는 눈치였다. "한 10㎏ 나가요." 값도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 우리도 머쓱해져서 다른 가게로 발걸음을 옮기고 말았다. 뒤통수에 대고 안주인이 고함을 지른다. "40만원이요." 놀라 기절하면 하고, 말면 말고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는 그 말이었다.
찬반은 반반으로 갈렸다. 찬성 쪽은 우리가 밥값을 많이 절약했으니 '이놈 한 마리는 먹어도 되지 않느냐'는 주장이었다. 반대쪽은 이틀 동안 먹어 치우기엔 '양이 많고 값이 너무 비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럴 땐 통상 찬성파가 이길 확률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반대파도 먹고 싶은 욕망을 마음속에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좋다. 사자." 본격적인 흥정이 시작되자 칼질을 멈춘 주인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난 아직 사람 보는 눈이 멀었어'란 자성의 태도가 목소리에서부터 달라지고 있었다. "제가 사람을 잘못 봤습니다"란 소리가 곧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30만원으로 낙찰됐다. 남은 대여섯 끼 식사는 생선회로 포식하고도 남을 분량이다.
여행을 떠나면 좀처럼 식당에서 밥을 사먹지 않는다. 경비를 줄이기 위함이다. 다섯 사람이 움직일 경우 하루 세끼를 모두 사먹는다면 줄잡아 20만원은 날아간다. 3박 4일이라면 밥값과 술값으로 100만원은 잡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저녁밥을 지을 때 양을 불려 아침까지 해결한다. 점심은 길가 정자에서 라면이나 수제비를 끓이면 맛과 멋이 동시에 느껴진다.
생선 대가리와 뼈를 푹 고은 국물을 붓고 라면을 끓이면서 낙지 먹통을 터뜨리는 먹물 라면 맛은 기가 찬다. 안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을 정말 모른다. 우리 도반들이 즐겨하는 이런 여행의 맛을 모르는 친구들은 "그런 고생스런 여행을 뭣 하러 하냐"며 핀잔을 주지만 오히려 그 말씀이 가소로워 그냥 웃고 만다. "글쎄 말이야, 내가 미쳤기 때문이지 뭐."
"오늘 저녁에 먹을 양만 회로 뜨고 나머지는 팔뚝 뭉치로 잘라 부직포로 감아 주세요." "아휴 생선회에 관해선 도사시네요. 아까 가격을 물어볼 때 전 알았어요." 무뚝뚝하던 남자가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수족관 안에서 숨만 떨어지면 헐값 처분해야 할 걸 비싼 값에 떠넘겼으니 좋아라할 수밖에, 입장 바꿔 내가 가게 주인이라도 그러겠다.
숙소로 돌아와 생선을 부위별로 저장해 두었다. 살점이 두꺼운 부분은 살얼음이 낄 정도로 숙성을 시켜 먹으면 식감이 쫀닥쫀닥해서 감칠맛이 난다. 냉동실에 너무 오래 두었다가 완전히 얼어버리면 그야말로 큰일이다. 오늘 저녁 만찬은 가장 맛있는 뱃살 부분과 껍질 요리를 먹기로 했다. 악어가죽을 닮은 두꺼운 껍질을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얼음물로 급랭시키면 쫄깃쫄깃한 멋진 요리가 된다. 참기름 소금에 찍어 먹으면 먹다가 옆 사람의 숨이 떨어져도 모를 지경이다.
돔 대가리, 털이 나지 않은 머리를 통상 대가리라고 말한다. 머리칼이 빠져버린 대머리 아저씨의 헤드(head)를 대가리라고 부르면 실례다. 한때 대머리인 높은 사람을 '× 대가리'라고 부른 적이 있지만 그것 또한 예의에 벗어나는 어투다. 그러나 돔은 그냥 대가리라 불러도 무방하다.
돔 대가리를 반으로 잘라 굵은 천일염을 출출 뿌려 참숯불에 구워 먹으면 두 다리 들고 자전거로 내리막길을 달리는 재미보다 낫다. 이건 정말이다. 그런데 이번 가을 여행에는 이렇게 큰 돔을 잡을 줄 모르고 참숯 화덕을 가져오지 않았다. 각설이 대목 장날 실수한다더니 내가 그 꼴이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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