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한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성수(43) 씨는 며칠 앞으로 다가온 회사 송년회 때문에 가슴이 콩닥거린다. '송년회 트라우마' 때문이다. 김 씨는 지난해 회사 인근 식당에서 열린 송년회에서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말았다. 폭탄주가 몇 잔 돌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쯤 건배사가 돌기 시작했다. 자신의 차례가 돌아와 술김에 벌떡 일어났지만 김 씨의 입에서 나온 말은 '위하여' 세 음절뿐이었다. 다음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뭘 위하지?' 하는 직장 동료들의 의아한 눈초리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올해는 두 번 다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서점에서 건배사 관련 책을 구입하고 다양한 건배사를 알려주는 스마트폰 응용 프로그램으로 결전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연말연시 모임은 물론 동창회, 동호회, 직장 회식이 잦아지면서 건배사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뻔한 건배사를 했다가는 분위기가 썰렁해지고 너무 경박하면 민망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힐링을 표현하는 따뜻한 건배사
11일 오후 경북대 북문의 한 식당. 대학 동창회 부부 동반 모임이 열리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흥겨운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덕담이나 건배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천동환 현대건설 대구경북지사장은 건배사로 '사이다'를 외쳤다. 천 지사장은 "사랑합니다. 여보, 이 생명 다 바쳐서 다시 태어나도"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참석자 부부의 질투 어린 시선을 즐기면서 부부 금슬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에 질세라 함께했던 세영회계법인의 김동열 이사는 '오바마' 하고 외쳤다. 순간 즐거웠던 모임에 긴장감이 살짝 흘렀다. 혹 '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 아닐까? 참석자들의 우려와 달리 김 이사의 '오직 바라보는 것은 마누라뿐'이라는 풀이가 이어지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최근 '폭주 송년회'가 줄면서 무조건 '마시고 죽자'는 식의 건배사 대신 따뜻하고 분위기 있는 건배사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가족 친화형이 다수 등장했고, 술을 적당히 마시자는 문구도 인기다. '원더걸스'(원하는 만큼 더도 말고 걸러서 스스로 마시자), '일일구'(한 가지 술로 1차까지만 하고 9시 전에 집에 가자) 등도 애용된다.
기 살리는 코멘트도 사랑받고 있다. '당신멋져'(당당하게 신나게 멋지게 져주며 살자) 등은 치열한 경쟁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여유를 주는 건배사로 활용되고 있다. '너나잘해'(너와 나의 잘나가는 새해를 위하여), '해당화'(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등은 가장 잘 팔리는 건배사다.
선창과 후창 형식의 건배사도 여전히 인기를 얻고 있다.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치면 좌중이 일제히 '아니다'고 화답하는 형식이다. 반전이 있으면 금상첨화. '(누구를) 위하여' 하고 외치면 '난 반댈세' 하며 반전으로 끝을 맺는 방식도 있다.
◆'위하여' 가고 스토리 장착
건배사에도 대세가 있고 시대상이 담겨 있다. 건배사에 시대가 처한 상황이나 세태 풍자가 없을 수 없다. 지난해 연말에는 대통령 선거 탓에 '박근혜 친근해'라는 건배사나 '여행가자'(여성이 행복한 가정을 만들자) 등이 인기를 끌었다. 공직사회에서는 '남행열차'(남은 기간 행동 조심하고 열심히 눈치 보다 차기 정권까지 살아남자)가 유행이었다.
올해는 관심이 정치에서 경제 쪽으로 넘어왔다. 불황을 극복하자는 뜻으로 '명품백'(명퇴조심, 품위유지, 백수방지)이나 '인펑'(인센티브 펑펑 달라) 등이 인기다.
질문 형식의 건배사도 유행이다. '가장 맛있는 라면은'이라고 묻고 '당신과 (함께라면)' 식으로 끝을 맺는 것이다. 다만, 중국의 방공식별구역이 이어도까지 확대돼 문제가 되자 '이어도'도 '우리땅'이라는 건배사도 등장했다.
스토리텔링 바람이 불면서 스토리를 장착한 건배사도 눈길을 끈다. 자신의 특이한 경력이나 경험, 다른 이의 역경 등을 들려주거나 책이나 뉴스를 인용한 뒤 마지막에 건배사를 제의하는 것이다. 스피치킴 김민지 원장은 "스토리가 있는 건배사는 남과 다른 것이어서 좌중의 눈길을 끌고 뭔가 다르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지만 자신보다 윗사람이 많은 모임에서는 스토리 건배사는 자칫 건방지고 버릇없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만큼 적당히 가려 할 필요가 있다. 또 스토리가 뻔하고 재미가 없다면 오히려 분위기를 지루하게 할 수 있어 평소에 스토리 무장을 단단히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잘 쓰면 약, 못 쓰면 독
2010년 11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앞둔 강원도 속초시의 한 만찬장. 이 자리에서 당시 경만호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는 건배사로 '오바마'를 외쳤다가 곤욕을 치렀다. '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라는 뜻으로 '오바마'를 외쳐 격의 없이 분위기를 띄우려고 했지만 성희롱 파문에 휩싸인 끝에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무심코 한 건배사가 화근이 되었다.
며칠 전 송년회에 참석했던 김종인(가명'중소기업 부장) 씨도 건배사 때문에 혼쭐이 났다. 김 씨는 건배사로 '성공과 행복을 위하여'를 줄인 말이라며 '성행위'를 외쳤다. 다음 날, 회식에 참석했던 여직원이 사내 홈페이지에 '부끄럽고 불쾌했다'고 글을 올리는 바람에 김 씨는 공개 사과까지 해야 했다.
반면, 8일 아내의 환갑잔치에서 건배사를 맡은 최영부 씨는 말 한마디로 평생 동안 쌓인 아내의 스트레스와 섭섭함을 한 번에 날려줬다. 최 씨는 "오늘은 사랑하는 아내의 환갑입니다. 이렇게 참석해주신 여러분들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제가 '조여사, 아직도 니가 제~일' 하면 여러분이 '예쁘다'라고 외쳐달라"고 분위기를 유도했고 환갑잔치는 한바탕 요란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김민지 원장은 "건배사를 잘 사용하면 약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되기도 한다. 최근 많이 조심하는 추세지만 아직도 건배사나 술자리 유머가 듣기 민망한 내용을 포함한 경우가 많다. '오바마'나 '진달래' '성행위'같이 성적인 표현이나 해석에 따라 오해를 사는 건배사는 삼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건배사 퇴출 위기
송년회 등 술자리에서 알토란 같은 역할을 했던 건배사의 지위도 흔들리고 있다. 사회적으로 절주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어서다. 또 전통을 자랑하는 몇몇 건배사는 퇴출 위기에 몰렸다.
삼성그룹은 12월 송년회 술자리에서 벌주와 원샷, 사발주(돌려 마시기) 등 3대 음주 악습을 몰아내는 운동을 펴고 있다. 한 명씩 일어나 건배를 제의하는 건배사는 허용하되 어감이 이상하거나 폭음을 유발하는 지나친 건배사는 자제하자는 운동이다.
특정 건배사는 퇴출 위기에 몰렸다. 직장과 모임의 화합과 단결을 위해 자주 사용되었던 '우리가 남이가'도 상용 빈도가 낮아지는 추세다. 지역감정을 조장할 수 있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다. 건배사의 영원한 바이블 '위하여'. 역시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지역 한 언론사 간부는 앞으로 건배사에서 '위하여'를 빼라는 엄명을 내리기도 했다. 진부하고 창조적이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나라 밖도 마찬가지. 영국 해군은 지난 200년간 사용했던 몇 개의 건배 구호를 퇴출하기로 했다. 그중 하나가 '우리의 아내와 애인을 위하여'(To our wives and sweethearts)인데 그다음엔 '그들이 절대 서로 만날 일이 없길'(May they never meet)이라는 대구가 따라오곤 했다. 앞으로 이 건배사는 사용이 금지된다. 대신 '우리의 가족을 위하여'(To our families)를 써야 한다. 물류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상곤 씨는 "평소 싱숭생숭하다가 유독 술자리에서 너나 가릴 것 없이 마음에도 없는 말 한마디씩 해야 하는 것은 사실 고역이다. 자연스럽지 않고 분위기를 엄숙하게 만드는 것도 싫다. 회사 내 모임에서는 건배사를 생략하고 있다"고 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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