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은 생전 근 300편에 가까운 시를 남겼다. 대부분 한시였다. 한학을 공부한 선비로서 심산은 망국과 독립 건국의 과정마다 자신의 심경과 사회적 현실을 시로 남겼다. 그의 시에서는 음풍농월 식의 시구를 찾아 보기 힘들다. 대신 나라를 걱정하고 민족을 안타까워하는 충정이 우러난다. 그의 생애를 연구하고 그의 정신을 잇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의 시를 한국 현대사의 증언이라고도 한다.
심산은 일제의 감옥에서 가출옥한 뒤 백양사에서 연금생활을 할 당시 70여 편의 시를 지었다. 신체의 부자유로 인한 제약을 한시를 통해 달랜 것이다. 이후 해방과 건국의 격동기마다 심산은 시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반외세 반독재의 투쟁에도 시를 활용했다. 분단의 와중에서 남북이 제각각의 길로 갈 때도, 이승만의 독재에도 시로 비판하고 항거했다.
일제의 법정에서 심산은 '나는 조선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한다' 며 끝내 변호사를 사절했다. 변호사를 사절함 이란 그의 시 일부다.
'병든 이 몸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았는데/ 어찌 알았으리 달성의 옥에 갇혀 해를 넘길 줄/ 어머님 돌아가시고 자식도 죽어 집이 망했으며/ 노처와 자부의 울음소리 꿈결에도 소스라치네/(중략) 바른 도리 얻어야 죽음도 영광인 줄 알리라/ 그대들의 구차한 변호 사양하노니/ 병든 이 몸 구차히 살기를 구하지 않노라'
단재와 일송 김동삼 등 동지들의 죽음을 듣고서는 슬프고 안타까운 마음을 시로 남겼고 도산과 홍명희와는 시로 교분을 다졌다. 일제말기 창씨개명과 신사참배의 열풍을 한탄하는 울분의 시도 있다. 건국 초기 우후죽순처럼 정당이 생겨나고 애국지사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거리에 넘쳐날 때에도 한시를 통해 파당과 분열의 폐단을 질타했다.
미처 피란을 가지 못한 채 잿더미가 된 서울에서 북의 전향 협박을 받을 땐 협박을 사절함이란 시로 김일성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겠다는 기개를 보였다. '한 오리의 터럭이라도 어찌 저들의 화복에 흔들리랴/ 저들에게 맡기노니 이마 위에서 쇠수레 돌리기를'
이승만의 비판에도 심산은 시를 즐겨 사용했다. 효창공원을 헐겠다는 주장에는 '독재의 공과 덕이 지금은 이렇듯 높을 지나/ 두고 보라 상전과 벽해 일순간에 뒤집힐 것을'이라며 권력의 유한함을 경고했다. 성균관 명륜당이 친일파 민족반역자에게 점거된 것을 한탄하여 '태학은 수선인데'란 시를 짓기도 했다.
말년의 심산이 남긴 시 '객을 사절함'의 전문이다. '올해 나이 여든 셋/ 우국우민 그 충정 한 꿈에 그쳤으니/ 이제부터 세상사 말하지 아니 하리/ 순국선열 뒤따라 저승에 놀고 지고'
서영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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