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대구경북 한 기초단체에서 있었던 일이다. 간부들이 모두 참석한 아침 회의에서 단체장이 격앙된 표정으로 목청을 높였다. "요즘 우리 지역엔 '태양이 두 개 떴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단체장 선거 출마 소문이 돌던 부단체장을 겨냥한 말이었다. 직후에 이 부단체장 방을 찾는 공무원들 발길이 뚝 끊길 정도로 설움을 겪었다. 이 부단체장은 절치부심 끝에 수년 뒤 그 단체장 자리에 올랐다.
북한에서 '2인자'로 군림하던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숙청된 것을 계기로 새삼 2인자의 명(明)과 암(暗)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장성택처럼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2인자 자리에 있다가 1인자의 눈 밖에 나 비운을 당한 2인자들이 숱한 가운데 2인자에서 1인자가 된 '행운아'도 적지 않은 것.
◆'살얼음판 신세' 2인자
2인자를 수식하는 영어 접두사 바이스(VICE)를 두고 어느 부단체장이 털어놓은 농담 반 진담 반 조크. "VICE는 우리말로 악(惡)을 뜻하기도 합니다. 단체장 입장에선 자기 자리를 노릴 수 있는 부단체장을 경계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 보니 단체장에게 껄끄럽고 부담스러운 존재가 바로 부(副)자가 붙은 사람입니다. 부단체장 처지에서도 단체장 눈치를 봐야 해 처신하기가 정말 어려운 자리지요." 부(副)를 파자(破字)해 보면 더 흥미롭다. 입(口)에 재물(田), 곧 부귀가 달렸으니 특히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그 입을 잘못 열면 칼(刀)이 날아온다. 그 입 바로 위에는 언제나 1인자(一)가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해방 이후 명멸한 2인자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대로 한국 정치사로 집약될 정도다. 이승만 정부에서 2인자로 군림했던 이기붕 당시 부통령은 3'15 부정선거, 4'19 의거 격랑 속에서 일가족이 몰살되는 비극으로 생을 마감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2인자를 두지 않은 채 서로 견제시키는 용인술(用人術)을 발휘했다. 표면적으로는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가 2인자였지만 김형욱, 이후락, 차지철 등 2인자급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대통령이 시해된 10'26을 2인자급 인물들 간의 다툼에서 촉발된 것으로 풀이하는 시각도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 밑에서 2인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2인자급 실세인 장세동 당시 안기부장 탓에 항상 '바늘방석'이었다.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2인자에서 1인자가 되는 행운을 차지했다. 김영삼'김대중'이명박정부에서 2인자로 군림했던 이들은 모두 감방에 가는 신세로 전락했다. YS의 아들인 김현철, DJ의 오른팔인 박지원 대통령 비서실장, MB 친형인 이상득 국회 부의장은 2인자 신세에서 영어(囹圄)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노무현정부에서 2인자였던 문재인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은 대권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박근혜정부에서는 박 대통령이 선친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아직 뚜렷하게 2인자가 떠오르지 않고 있다. 대통령과 오랜 인연을 맺고 있는 서청원'김무성 의원,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 등이 2인자급으로 거론되지만 아직 2인자로 올라서지는 못한 상태다.
◆2인자로 살아남으려면?
미국'중국에서도 2인자 자리는 그리 녹록하지 않다. 세계 최강국 대통령 바로 다음인 미국 부통령은 역사적으로 형식적, 의전적 자리에 불과했다. 미국 초대 부통령인 존 애덤스는 '부통령이란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가장 무의미한 직책'이라고까지 신세 한탄했다. 그러나 미국 부통령에겐 대통령 유고 시 대권 승계권이 있다. 부통령인 린든 존슨은 암살된 케네디를 이어, 제럴드 포드는 워터게이트로 전격 사임한 닉슨에 이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역대 부통령 가운데 임기를 마친 후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람은 존 애덤스, 토머스 제퍼슨, 마틴 반 뷔렌, 조지 부시 등 4명뿐이다.
사회주의 중국을 만든 마오쩌둥(毛澤東)의 2인자는 저우언라이(周恩來)였다. 1949년 10월 중국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26년 4개월 동안 총리로 재직했다. 저우언라이가 2인자로 장수할 수 있었던 것은 1인자인 마오쩌둥 앞에 나서지 않은 '양보의 미덕' 덕분이었다. '허우타이'(後臺'무대 뒤에 있는 사람)를 자처해 늘 마오쩌둥보다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의 2인자인 찰리 멍거는 버핏이 마이크를 넘겨주기 전까지 먼저 말하지 않는 철칙을 갖고 있었다.
1인자가 돋보일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항상 2인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2인자의 이미지에는 '패배자'라는 뉘앙스도 묻어 있다. '성공한 2인자들'은 1인자와 대적하기보다는 그를 보좌해 신화 창조에 기여하는 인물들이었다. 1인자를 돕고 3인자, 4인자를 독려해 조직을 성공으로 이끄는 '2인자의 리더십'을 갖춘 이들이 성공 가도를 달린 것.
리더십 전문가들은 "최고 결정권자의 결정을 서포트해야 하는 2인자는 1인자인 보스보다 먼저 생각하고, 리더보다 멀리 내다보고, 상사보다 재빠르게 움직여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1인자의 역린(逆鱗'용의 목에 거꾸로 난 비늘. 즉 군주가 노여워하는 군주만의 약점 또는 노여움 자체를 가리키는 말)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2인자가 살아남는 비결이란 것을 장성택의 실각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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