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함께'와 '나눔'…김치, 삶의 의미를 맛보게 하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등재, 문화로 번진 김장

지난달 21일 새마을회 주최로 경주 시민운동장 앞 광장에서 열린 행사.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지난달 21일 새마을회 주최로 경주 시민운동장 앞 광장에서 열린 행사.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해마다 이맘때면 소외계층을 위한 김장 행사도 곳곳에서 열린다. 신문 지상에는 각종 기업'단체'기관이나 유명인사들이 앞장서서 김장 나누기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거의 매일 소개된다. 그동안 잊고 지냈던 이웃을 생각할 때가 됐음을 알리는 '연하장'(年賀狀)인 셈이다. 유네스코가 최근 인류무형유산(Intangible Cultural Heritage of Humanity)으로 등재하면서 관심이 크게 높아진 우리의 김장 문화를 둘러봤다.

◆나눔의 정신…연대감 증대

채소를 절이거나 발효시키는 식품은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처럼 가족이나 이웃 등 공동체를 중심으로 비슷한 시기에 대량으로 김치를 담그는 일은 드물다. 유네스코 무형유산위원회도 5일 한국의 '김장, 한국에서의 김치 만들기와 나누기'(Kimjang: Making and Sharing Kimchi in the Republic of Korea)의 등재 결정을 내리면서 "김장이 한국인들에게는 이웃 간 나눔의 정신을 실천하는 한편 그들 사이에 연대감과 정체성, 소속감을 증대시켰다"고 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전통적 김장 나눔의 의미를 실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학생'일반인들을 위한 체험학교인 보현자연수련원(영천 자양면 보현리)의 조정숙(56) 원장은 매년 11월 말이면 '대역사'(大役事)를 치른다. 바로 김장이다. 그런데 그 양이 일반 가정집과는 차원이 다르다. 해마다 2천~3천 포기를 대엿새에 걸쳐 담그는데, 재료비만 500만~700만원가량 든다. 5년을 묵혀 나트륨 함량을 낮춘 국산 천일염은 물론 오가피, 헛개나무, 산삼배양근 등 13가지 한약재까지 넣기 때문이다.

물론 혼자 먹는 것은 아니다. 김장에 참여하는 이웃 주민들과도 나누지만 수백 포기는 지인들에게 선물한다. 4인 가족이 겨울을 나기에 충분하게 20㎏짜리 박스 2개씩을 보낸다. 2010년 세계김치문화축제에서 수상하기도 한 조 원장은 "김치는 한국인에게 가장 중요한 음식 가운데 하나인데 지인들이 아무 김치나 먹어서야 되겠나 싶어 보내고 있다"며 "받은 분들이 맛있다는 인사말을 해주면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도시 공동체 복원사업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대구 달서구 두류1'2동 11통 '파도고개 미(美)로마을'에서는 4일 마을 골목길에서 주민, 자원봉사자 1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김장 담그기 행사가 열렸다. 이곳은 190여 가구 460여 명이 거주하고 있는 가운데 노인인구가 20%를 차지한다.

하지만 이날 주민들은 어느 때보다 흥에 넘쳤다. 주민 리더가 직접 기획하고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마을공동체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골목길 50m를 통제하고 진행한 행사에서 주민'자원봉사자는 6인이 한 조가 되어 김장 잔치를 열었다. 버무려진 김치는 각 가구가 10㎏씩 골고루 나눴다. 신수연 11통 통장은 "김장을 위해 주민들이 사전에 주민회의를 개최하고 서로의 의견을 수렴해 물품을 구입했다"며 "이런 행사를 통해 동네가 나누고 도우며 함께하는 공동체로 거듭나고 있다"고 소개했다.

◆가족공동체 결속의 매개체

일부 학자들은 3천 년 전부터 김치가 있었다는 견해를 내놓지만 오늘날과 같은 김치는 고추가 들어온 임진왜란 이후에 등장했다. 1766년에 쓰인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유중림이 '산림경제'를 증보하여 엮은 농림서)에서야 빨간 김치에 관한 기록이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문헌들로 미루어 볼 때 17, 18세기에는 소금절임이나 초절임 김치가 일반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김장 문화는 농가에서 달마다 해야 할 일을 적은 행사표, 즉 '월령'(月令)을 적은 자료인 '농가월령가'에도 등장한다. 정약용 선생의 둘째 아들, 정학유의 작품으로 알려진 '농가월령가' 10월령에는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깨끗이 씻어 소금 간 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조기 김치 장아찌라'라는 대목이 있다. 김치 담그는 풍속이 널리 자리 잡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장 품앗이는 핵가족화와 도시화로 예전처럼 마을공동체가 나서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식습관의 변화로 김치 소비 역시 줄어들고 있기도 하다.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국민 1인당 하루 김치 소비량은 1998년 83.8g이었으나 2011년에는 68.6g으로 20% 가까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김장 문화는 가족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중요한 매개체로서의 역할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결혼 이후 3년째 친정어머니, 시어머니와 함께 김장을 한다는 이지훈(30'대구 남구 봉덕동) 씨는 "배추절임은 김천에서 농사를 지으시는 시어머니가, 양념 재료는 포항에 계신 친청어머니가 해서 1박 2일 동안 함께 김치를 담근다"며 "양가 어르신들이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김장을 통해 우의를 쌓을 수 있어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김중순(59) 계명대 한국문화정보학과 교수는 이와 관련, "김장 문화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참여와 공유는 21세기적 가치로 꼽힌다"며 "핵가족시대에는 이런 고유문화가 사라질 것이란 우려가 많았지만 인류무형유산 등재로 공동체문화가 다시 한 번 주목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편 배추'고추와 같은 김장 원재료의 가격이 해마다 널뛰기를 하면서 김장 비용은 예나 지금이나 언론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20년 전인 1993년 11월 17일 자 매일신문 칼럼 '야고부'는 "김장철을 앞두고 배추를 밭떼기로 썩히거나 소먹이로 줘야 하고 고추값마저 14%나 떨어졌으니 억장이 무너질 노릇이다"라고 썼다. 김장은 또 가장의 경제력 잣대이기도 했다. 그해 11월 25일 자에 매일신문은 '변화… 그 격동의 오늘'이란 기사에서 "은행원 하면 우리나라 화이트칼라의 대명사였다. 안정되고 편안한 직장, 남아도는 돈을 주체하지 못해 온갖 수당, 보너스가 쏟아져 김장보너스까지 받을 때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몇 달치 월급과 맞먹는 비용이 김장에 들어가던 시절이었다.

이상헌 기자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