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지나간다

내 나이 30대 후반 무렵, 세월이 흘러 빨리 50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워킹맘으로서 돈과 시간과 잠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돈은 언제나 모자랐고, 살림하랴, 직장 다니랴, 아이들 거두랴 아쉬운 잠과 시간 때문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돌아다녔다. 일종의 다목적 배우였다. 딸인 동시에 며느리며, 아내이고 엄마이며, 부하이고 상사였다. 부분인가 하면 전체이고, 주변인가 하면 중심이며, 과거인가 하면 미래이기도 했다.

더러는 멀리 도망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연달아 사나흘 야근하고 집으로 향하는 깊은 밤, 다시 또 집에 가서 감기 든 막내, 작은아이 숙제검사, 큰아이 기말고사 걱정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아득했다.

말을 달려 사하라 사막으로 숨어들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런 나에게 '진정한 여자의 미는 30대'라느니, '프랑스에서는 여자가 35세가 되려면 47년이나 걸린다'는 말 같은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오히려 여자로서 한창나이인 것도 부담스러웠다. 현실은 버거웠고 마음은 늘 조급했다.

퇴직을 하자 비로소 내가 보였다. 자식들이 앞다투어 집을 떠나준 덕에 온전한 나의 마당이 펼쳐진 것이었다. 나의 삶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출근할 필요도 없으니, 잠 떨치고 일어날 일 없고 사지 멀쩡하니 어디든 돌아다닐 수 있다. 의식주 해결되니 거리에 나앉을 일 없거니와, 마음 내키면 친구들한테 나물밥도 살 수 있다.

나이 듦도 과히 나쁘지 않다. 젊은 시절 꽃만 보이고 잎은 보이지 않던 것이, 나이 듦에 조금씩 보이는 것도 수확이다. 나의 못남이 내 삶의 본질임을 알아챈 것도, 지구의 축이 더 이상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지 않음을 눈치 챈 것도 나이 듦의 덕분이고 위안이다.

황금, 소금, 지금 중에 '지금'이 최고라는 말이 있다. 영어권에서는 아예 '현재'(present)를'선물'(present)과 동의어로 쓰기도 한다. 현재야말로 신이 내린 선물이라는 뜻일 터이다. 왜 진작 몰랐을까. 삶의 마디마디가 참으로 귀한 선물이었던 것을.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것을. 죽기 전 엘비스 프레슬리도 노래하지 않았던가. 'It's now or never!'라고.

시간만큼 공정하고 엄격한 것이 있을까. 다윗 왕의 반지에는 'This too shall pass.'(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승리도 패배도, 기쁨도 슬픔도 지나가기 마련이라는 뜻이다. 이 해가 가기 전, 묵은 반지에다 다윗의 흉내나 내 볼까나. 계사년도 꼬리를 흔들며 지나가고 있으니.

소진/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giok04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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