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기고] 현제명과 노래비

현제명 선생의 노래비 건립 문제가 논란을 일으키고 있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석(玄石'현제명의 아호)은 누가 뭐라 하더라도 우리나라 음악계의 대부이자 우리 대구의 자랑이다.

논란의 핵심은 그의 친일 행적과 빗돌의 설치 위치인 것 같다. 현석이 아무리 우수한 음악가이고, 우리나라 음악 발전에 토대를 쌓았다고 하더라도 36년 동안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 민족이나 독립운동을 위해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국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친일 활동은 용서받지 못할 일일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 말했듯이 '그 모진 세월을 살아보지 못하고, 지금의 잣대로 그들을 함부로 비난할 수는 없다. 당시 음악계의 지도자들이 실제로 강요나 협박에 못 이겨서 억지로 협조한 것일 수도 있다'.

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창설의 주역이었고 제국주의 일본의 황군을 격려하는 '가는 비' '서울' 등의 노래를 작곡하고 친일 단체인 조선음악협회의 이사를 맡기도 해 일제 말 친일 음악계의 대부로 평가받았다"는 비난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러나 현제명은 국민 가곡으로 불리는 '고향생각'과 '그 집 앞' '나물 캐는 처녀' '희망의 나라로' 등 주옥같은 가곡과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춘향전'을 남겼다. 필자가 선생의 노래비 설립을 지지하는 이유는 첫째 광복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을 근거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692명의 명단에 현제명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명단에 없다고 하여 그의 친일 행위가 정당화될 수 없지만 독립운동가의 후손들로 구성된 광복회가 사면(?)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이와 달리 모 예술가는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한 처벌 대상자인데도 그를 현창하는 문학관, 문학제 등에 언론, 지자체, 대학이 연계하여 지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역시 그의 과거 행적보다 예술성을 높이 평가한 것 때문이 아닌가 한다.

셋째는 같은 시대 같이 활동을 했던 홍난파(1898~1941)의 경우다. 그 역시 친일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의 현창사업은 기념관이나, 난파음악상을 통해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가장 권위 있는 음악상이 되었다.

현제명 선생을 어떻게 보야 할 것인지를 가장 잘 설명한 분이 지역의 원로 음악가 남세진 교수다.

남 교수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현제명과 박태준은 한국 최고의 음악인이다. 그럼에도 제대로 조명하지 못해 빛이 바랜 면이 있다'면서 '흔히 현제명 선생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는데, 당시 상황과 분위기를 정확하게 모르는 상황에서 너무 한쪽으로 몰아세우는 것 아니냐'고 했다. 그는 '친일 행적은 친일 행적으로 평가하고, 음악적 업적은 또 그것대로 따로 평가해야 한다. 친일 행적 때문에 소중한 국가적 자산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어 남 교수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세계적인 지휘자 카라얀은 나치 당원으로 활동했지만 면책받았고, 왕성한 활동을 계속해 위대한 음악적 업적을 이루었다'며 우리가 우리를 홀대하는데, 어떻게 한국 최고, 세계 최고가 될 수 있겠느냐. 현제명 선생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계 전체가 상대의 잘못보다는 잘하는 점에 주목할 줄 알아야 더욱 성장할 수 있다'고 했다.(매일신문 2011. 3. 11.)

이런 점을 볼 때 친일이라는 점만 부각해 현제명 선생을 단죄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만약 친일이 걸림돌이라면 그 내용을 표석에 기록해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늘 선한 일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과도 있으니 솔직히 기록해 두는 것도 좋다고 본다. 건립 장소는 계성학교 시절 뛰놀며 감성을 다듬었을 소년 시절의 추억이 깃든 청라언덕 일원이 좋을 것 같다.

이정웅/달구벌 얼찾는 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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