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방 앉아 해외쇼핑 소비패턴 확 바꾼 '직구' 열풍

클릭 몇 번에 국내의 반값…무너지는 '유통국경'

해외 직구족이 늘면서 국내 유통
해외 직구족이 늘면서 국내 유통'수입업체들은 울상을 짓고 있다. 유통업체들은 이에 맞서 파격적인 가격을 앞세운 대형 기획 행사를 앞다퉈 열고 있다. 롯데백화점 제공

'복싱데이에 어부바 원해요.' '블프에 더담 끼워주실 분~.'

외계어 같은 이런 표현들은 회사원 박창규(30) 씨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다. 즐겨 찾는 인터넷 카페의 게시판에 요즘 자주 올라온 글들이기 때문이다. 2030세대를 중심으로 폭발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해외 직구' 카페다. 복싱과 직구가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는다면 '유통 혁명'에 뒤처지고 있는 기성세대임을 인정해야 한다. '끝판대장' 오승환의 돌직구보다 더 빠르고 강력한 '직구'(직접구매)가 불러일으키고 있는 소비 패턴의 변화 현장을 찾아봤다.

◆잠깐만요~쇼핑 전 해외 온라인몰부터 가실게요

해외 직구는 해외 브랜드 제품을 외국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직접 구입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10년 무렵 배송대행업체들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한 뒤 SNS'입소문을 타고 확산되고 있다. 올해 국내 소비자들의 해외 직구 신용카드 결제액은 1조2천700억원 규모로 추산된다. 지난해 9천700억원보다 30%가량 늘어날 것이란 게 카드업계의 전망이다.

17일 늦은 오후, 회원 수가 30만 명이 넘는 직구 카페 '몰테일 스토리'에 들어가니 각종 쇼핑 정보가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됐다. '해외정보 & 핫딜' 코너에서는 국내 지명도가 높은 브랜드, 온라인 쇼핑몰의 세일 소식에 10여 분 만에 3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분기별 누적 해외 신용카드 사용액이 5천달러를 넘으면 관세청 블랙리스트에 오른다'는 뉴스는 몇 시간 만에 1만2천 회에 가까운 조회를 기록했다.

구매 내역에 대해 캐시백을 적립해주는 웹사이트 '이베이츠'는 이날 자사 이용자 수와 주문 건수가 2011년에 비해 각각 7, 8배 증가했다고 밝혔다. 회사 측은 "해외 직구는 상품 품질에 대한 신뢰와 가격 매력도가 높다"며 "국내 소비자들의 해외 직구 이용률이 꾸준히 상승할 것"으로 예상했다.

특히 올해 미국 '블랙 프라이데이'(Black Friday)에는 국외 쇼핑몰 이용자 수와 결제액이 급증하면서 직구 열풍이 더욱 달아올랐다. 국민적 관심사가 되면서 유명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직구족(族)들이 줄여서 '블프'라고도 부르는 블랙 프라이데이는 추수감사절(매년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 다음 날로, 미국에서는 각종 상품을 연중 최저가로 구입할 수 있는 대목으로 통한다. 최근에는 번잡한 '블프' 다음 주 월요일을 의미하는 '사이버 먼데이'도 등장했다.

블랙 프라이데이가 미국 풍습이라면 영국에는 '복싱데이'(Boxing Day)가 있다.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이다.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주변 친구들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박스에 포장된 선물을 나누는 데서 유래됐다. '블프'와 마찬가지로 전날 저녁부터 백화점'쇼핑몰 앞에 긴 입장 행렬이 늘어서는 최대 쇼핑 기간이다. 국내에서도 이번 '블랙 프라이데이 광풍' 이후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해외 직구족이 늘면서 관련 카페'블로그에는 '전문 용어'도 속속 등장했다. '어부바'는 구매 대행의 개념이다. 무료 배송비 혜택 또는 해외 사이트에서 결제가 되는 신용카드가 있는 사람들에게 송금해주고 '업혀서' 구매하는 방식이다. '더담'은 이왕 쇼핑 바구니에 담는 김에 더 담아달라는 뜻이다. 배송료와 관세를 절약하기 위해 공동 구매한 뒤 나눠갖자는 아이디어다. 또 '배대지'는 배송 대행지의 줄임말로 해외 쇼핑몰에서 구매한 상품을 현지에서 대신 수령한 뒤 한국으로 다시 보내주는 업체의 주소이다. 물론 한국으로 '직배'(직접 배송)해주는 쇼핑몰도 있다. '벼룩'이란 말도 흔히 쓰인다. 직구 3년차라는 주부 김미영(33) 씨는 "구입 후 사이즈가 맞지 않는 의류, 신발 등은 인터넷을 통해 팔기도 한다"며 "해외 직구를 통해 쇼핑한 물건은 반품'교환이 어렵기 때문"라고 했다.

◆한글 쇼핑몰도 등장…유통 혁신 본격화

해외 직구의 급성장은 국내 소비자 가격에 비해 훨씬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는 점이 널리 알려지면서다. 지난 8월 대한상공회의소가 온라인 쇼핑족 1천6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해외 직접구매 이용실태 조사'에 따르면 직구 선호 이유(복수응답 허용)로 '국내 동일 상품보다 싼 가격'(67%)이란 응답이 가장 많이 꼽혔다. '국내에 없는 브랜드 구매'(37.8%), '다양한 상품 종류'(35%), '우수한 품질'(20.3%) 등이 뒤를 이었다.

실제로 지난 '블프' 때는 삼성전자의 대형 LED TV 가격이 화제였다. 아마존 등 해외 인터넷 쇼핑몰에서는 배송비와 관세를 더하더라도 국내 가격의 절반이 조금 넘는 수준에서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기간 동안 TV 구매대행 행사를 벌였던 국내 한 업체에 하루 300여 건을 웃도는 주문이 몰리면서 행사를 조기 종료하는 일도 벌어졌다.

하지만 직구족들이 가장 많이 구입하는 품목은 의류 등 생활용품들이다. 대한상의 조사에서는 주요 구입 품목이 의류(41.5%), 구두'액세서리 등 패션잡화(40.8%), 건강식품(34.5%), 유아용품'의류(29.3%), 가방'지갑(28%), 화장품(26.8%), 식품(14%), 전자제품(11%) 순으로 나타났다.

이는 아직까지 해외 직구가 2030세대 위주로 이뤄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배송대행업체 '몰테일'의 연령대별 이용자 비율은 20대 16.2%, 30대 76.8%, 40대 6.1%, 50대 이상 0.9%이다. 성별로는 남성 16.5%, 여성 83.5%로 30대 여성이 특히 많다. 주부 김미영 씨는 "인터넷 육아 카페에서 아기 의류, 육아용품을 직구로 사면 훨씬 싸다는 정보를 알고 직구족이 됐다"며 "구매 방법을 알려달라며 노트북을 들고 찾아오는 엄마들도 주변에 많다"고 전했다.

직구 붐을 타고 최근에는 한글로 운영하는 해외 쇼핑몰까지 등장했다. 유아용품'식료품'미용용품을 판매하는 '아이허브'가 잘 알려져 있다. 주부 이현주(37) 씨는 "국내 온라인 쇼핑몰처럼 이용하기가 쉬워 세제류, 보디용품, 영양제를 많이 산다"며 "국내 가격의 50%밖에 하지 않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는 너무 신기했다"고 했다.

지난해 3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로 관세 장벽이 낮아진 점과 원화 가치의 강세도 직구 확산의 또 다른 배경이다. 의류'신발'서적'DVD 등의 '목록 통관' 품목은 물품가격이 200달러 이하인 경우 관세'부가세가 면제된다.

이와 관련, 신세계그룹 미래정책연구소는 11일 발표한 '2014년 유통업 전망 보고서'에서 내년도 유통업계의 키워드로 '탈경계화'를 의미하는 'BEYOND'를 제시했다. 탈국경화(Borderless), 탈장소화(Everywhere), 탈연령화(Young & Old), 탈채널화(On & Off), 탈시장화(New Markets), 탈시간화(Day & Night) 등 6개 단어 첫 글자의 조합이다. 정보통신(IT) 기술의 발달과 소비자 구매 패턴의 변화에 따라 유통업계에 기존의 틀을 깬 새로운 시도가 본격화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자칫 '개미지옥'에 빠질 수도

같은 상품을 훨씬 저렴하게 살 수 있다면 소비자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뻔하다. 그것도 약간의 영어 실력과 인터넷 클릭 몇 번의 수고로 가능하다면?

하지만 직구에도 분명 단점은 있다. 직구족들이 꼽는 가장 큰 문제점은 필요없는 소비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직구 2년째인 회사원 박창규 씨의 경우 연간 100만원어치 정도만 해외 쇼핑몰에서 구입하지만 후회할 때도 적지 않다. 27개월 된 딸의 옷가지 등을 사다 보면 억지로 면세 한도까지 쇼핑 바구니를 가득 채우고 싶은 생각이 자꾸 드는 탓이다. 박 씨는 "이왕 사는 것이라면 최대한 혜택을 봐야 한다는 욕심이 저절로 생긴다"며 "저렴하다는 장점 때문에 과소비하는 역설을 두고 직구족 사이에서는 '개미지옥'이란 말도 흔히 쓰인다"고 소개했다.

최저가 판매 행사를 검색하다 보면 시간도 많이 뺏기게 되지만 해외 쇼핑몰들의 '꼼수'를 주의해야 한다. 블랙 프라이데이, 복싱데이 등을 맞아 추가 세일을 한다고 선전하지만 실제로는 이전 가격과 차이가 없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주부 최기영(34) 씨는 "눈여겨봐 둔 상품을 세일한다고 해서 구입하려고 보니 정가를 높여서 할인 폭이 큰 것처럼 속임수를 부린 것이었다"며 "해외 브랜드라 하더라도 개발도상국에서 생산해 국산보다 품질이 못한 제품도 있다"고 귀띔했다.

이 밖에 해외에서 배송되기 때문에 배송 기간이 열흘 이상으로 길고 애프터서비스를 받기 어렵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또한 의류'신발 등의 품목은 국내 제품과 해외 제품의 사이즈 표기가 달라 구매 전에 꼼꼼히 확인할 필요가 있다.

해외 신용카드 사용액이 큰 폭으로 늘면서 신용카드 업계는 웃고 있다. 배송비 할인 또는 무료 혜택을 앞세워 신규 고객 확보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반면, 국내 유통'수입업체들은 울상이다. 직구족들이 오프라인 매장을 찾아 디자인'치수 등만 직접 확인하고 정작 구매는 해외 온라인 쇼핑몰에서 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고가의 일부 유명 브랜드들은 회사 수익을 유지하기 위해 한국에서의 자사 미국 쇼핑몰 접속을 차단하기도 해 항의를 받기도 했다. 대구의 한 백화점 관계자는 "유통업체들로서는 직수입 판매전을 확대하거나 파격적인 대형 기획 행사를 여는 정도가 대응책이지만 한계가 있지 않겠느냐"고 하소연했다.

김민정(52) 계명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해외 직구의 보편화를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며 "이미 막을 수 없는 현상인 만큼 국수적 접근은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또 "구태의연한 사업모델을 유지해온 국내업체들에는 경종을 울리는 좋은 계기"라며 "스스로 스마트하고 유능한 소비자로 평가받기 원하는 국내 소비자들의 니즈에 맞게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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