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천하는 선비정신 心山 김창숙] (19)꺾이지 않는 기개

가난·병마 달고 산 노년, 떠나는 날까지 이승만 독재에 불굴 저항

◆외로운 말년

심산의 말년은 외로웠다. 해방 후 신생 정부 수립과정에서 동료를 모으거나 정당을 만들지도 않았던 데다 사사건건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싸우는 심산에게 모일 사람은 많지 않았다. 심산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와 싸웠으며 그만큼 독재의 압박을 견뎌낼 사람도 드물었다.

심산은 이승만을 '독부'라 불렀다. 민심을 잃어서 남의 도움을 받을 곳이 없어진 외로운 남자라는 뜻이었다. 심산은 옳은 것은 옳고 틀린 것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심산의 눈에 이승만의 독재는 국가의 미래를 볼 때 잘못하는 것이었다. 이승만의 독재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나라의 장래가 암울하다고 여긴 심산은 권력자 이승만에게 감히 아무도 할 수 없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심산이었기에 사람들은 심산의 옆에 가기를 두려워했다.

노구의 병마도 그를 괴롭혔다. 일제의 고문으로 반 앉은뱅이가 된 터에 병원출입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난은 말년의 심산을 더 힘들게 했다. 1958년 7월의 어느 날 동아일보에는 심산의 근황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노환으로 대구의 내과병원에 입원중이라는 기사말미에는 약값조차 없는 처참한 실정이라는 심산의 집안 형편이 소개됐다.

해방 후 10여 년간 성균관대학 학장과 총장직을 맡은 일 외에는 변변한 감투 하나 써 본일 없는 심산이었지만 마음만 달리 먹었으면 돈을 만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담배 한 갑 조기 한 마리도 함부로 받지 않았던 심산이었다. 비리와 불의의 검은 돈은 아무리 작더라도 물리쳤다. 공적으로도 불의의 돈은 아예 만지지 않았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심산의 강직한 성품이 그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했다.

유도회 내분의 시작도 따져보면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심산의 성품 때문이었다. 당시 성균관 재단이사장을 맡은 이가 심산에게 윤모 씨로부터 8천만환을 기부 받는 조건으로 부원장직을 주자고 제의한 적이 있었다. 심산은 "세인이 다 아는 친일파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 며 "불의의 돈을 받는 것은 공맹의 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거부했다. 제안을 거부당한 측이 심산에게 반기를 들고 배척운동을 시작한 것이 유도회 분규 발단의 시작이었다.

◆독재와의 투쟁

가난과 병마의 외로운 삶에서도 심산은 이승만과 자유당 독재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혁신계 인사들의 정치활동을 억제코자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이 벌인 1958년의 2'4 파동 이후 심산은 여생을 국민주권 옹호에 바치겠노라 선언했다. 자유당은 언론과 야당 탄압을 위해 언론규제조항을 강화한 신국가보안법을 국회에 상정,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경찰을 투입해 야당을 감금하고 국회의사당 정문을 폐쇄한 채 벌인 폭거였다.

심산은 보안법은 민중을 억압하는 망국법이라며 이로써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경찰국이 됐다고 비난했다. 또 이승만은 국민 앞에 사과하고 하야하라고 촉구했다. 늙고 병들었지만 불굴의 의지는 흔들리거나 꺾이지 않았다. 3'15 부정선거가 있기 얼마 전 신채호의 24기 추도회 석상에서 이승만에 대한 심산의 비판 강도는 더 높아졌다. 수백 명의 청중들에게 심산은 우리나라를 미국의 위임통치에 맡기자고 한 이승만을 임시정부에서 축출하기 위해 신채호와 공동 투쟁한 사실을 소개하면서 이승만은 이완용에 버금가는 매국 행위를 했다고 비난했다. 당시로선 감히 누구도 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듣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말이었다.

이승만의 독재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대한민국의 장래가 없다고 여긴 심산은 투옥과 테러, 협박을 피하지 않았다. 이승만과 자유당의 눈에 심산은 가시였다. 심산인들 타협의 달콤함을 왜 몰랐을까. 그러나 민심이 등을 돌리고서는 나라가 잘 될 리 없다고 여긴 심산에게 독재와의 타협은 애당초 기대하기 어려웠다.

노년의 심산은 독재와 싸우는 한편 가난과 병마, 외로움과 처절하게 싸웠다. 집 한 칸 없는 서울에서 심산은 친척집과 여관을 전전했다. 가난과 병마와 독재와 불의와 싸우던 심산은 결국 1962년 5월10일 세상을 떠났다.

◆별은 떨어지고

심산의 장례는 국민장과 같은 대우의 사회장으로 동대문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치러졌다. '백세사 만세법' 등이 새겨진 만기 100여 폭이 유해를 둘러쌌다. 하늘에는 검은 만장을 늘어뜨린 경비행기가 조문 비행을 했다. 운구행렬은 그가 길러낸 성균관대학교의 학생 제자 수백 명이 맡았다. 유해는 그와 함께 독립투쟁을 벌이던 신익희 등 선열들이 묻힌 수유동 도봉산 기슭에 안치됐다.

심산의 장례식에 당시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조사를 보냈다. 박정희는 '심산 선생의 파란 많은 한평생은 고난에 찬 이 나라의 현대사를 그대로 엮은 것'이라며 '불의와 사악에 언제나 앞장서서 항거한 선생의 출중한 기개는 민족의 귀감'이라고 칭송했다. 덧붙여 정권의 무성의로 90평생 마지막 날까지 고독과 빈곤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을 애석해 했다.

언론계 대표 고재욱은 "선생은 언제나 국민의 대변자로서 국정을 비판하는 양심을 잃지 않았다"며 "국민들은 선생의 대쪽 같은 직언과 정론을 존경했다"고 애도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선생의 강지가 추호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아 유림 내부의 반발과 비난도 샀고 거친 세파에 부딪혀 격랑의 소음도 없지 않았으나 옹은 정치가가 아니요 혁명가이며 경세의 재략보다 애국지사의 귀감이었기에 만년의 고독과 고난이 더욱 빛난다'고 심산의 일생을 조명했다. 심산을 피곤하게 여기던 사람들도 하나같이 그의 떠남을 아쉬워했다. 그러나 세상은 곧 그의 존재를 잊어버렸다.

심산의 이름은 1978년 성균관대학교 인문 사회과학 교수들이 중심이 된 심산사상연구회 창립 이후 다시 세인들에게 회자됐다. 심산사상연구회는 진보적 민족운동가로서의 심산의 뜻과 불굴의 실천정신을 새기고자 창립한 연구 모임이었다. 당시는 자유당 정권보다 더 한 유신 독재시대였다. 모임은 쉽지 않았지만 불의와 싸워 온 심산의 선비정신을 기리자는 시대적 요구도 강했다. 연구회측은 1986년부터는 불의에 저항하고 민족정신을 높이는 학술 실천 활동을 해 온 지식인과 단체를 대상으로 심산상을 수여했다. 상금 700만원은 연구회 출판수익과 회비로 모았다.

심산상은 2006년을 끝으로 중단된 상태다. 재정난이 표면적 이유다. 심산상의 중단을 아쉬워 하는 사람들은 학교와 재단이 발 벗고 나서야 한다고 촉구한다. 심산에 관한 관심이 줄어 든 시대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는 이도 많다. 얼마 전 심산연구회 주최 강연회에서 김용옥은 체제의 억압과 싸운 심산의 선비정신을 소개하며 학생들에게 대의를 가지라고 충고했다. 먹고살기가 급급해진 세상이지만 나라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는 젊은이들에게 나라의 미래를 믿고 맡길 수 있겠느냐는 질타였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의 대의를 꺾지 않았던 심산의 기개를 배우라는 충고이기도 했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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