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랑 한 장 남은 달력이 유난히 애처롭고 쓸쓸하다. 가는 해가 아쉽기만 하고 늘어만 가는 나이에 한숨이 절로 난다. 그러나 평소 '부어라 마셔라'를 외쳐왔던 주당들에게는 1년 내내 손꼽아 기다려왔던 '대목'이다. 하지만 올해는 이런 기대를 살짝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시끌벅적한 술자리 행사의 송년회가 사라지고 있어서다.
대신 그 자리에 공연'연주회 등 문화행사와 어려운 이웃과 정을 나누는 봉사활동 등 '착한 송년회'가 확산되고 있다. 가족과 지인, 동호회 중심의 송년문화가 늘고 있는 점도 달라진 현상이다. 맞춤형 장소도 등장하고 있다. 공연장, 펜션, 봉사하는 장소 등 과거 식당 중심의 송년회에서 각양각색의 장소들이 등장하고 있다. 유난히 추울 것으로 예상되는 올겨울. 착한 송년회는 더욱 반갑다.
◆술자리 대신 문화'여행 즐겨
최근 대구의 극장과 공연가에는 직장인들의 단체 예매가 늘고 있다. 송년회 모임 때 식사는 간단히 해결하고 대신 영화나 연극, 뮤지컬 등을 보며 친목을 도모하는 것이다. 특히 최근 20, 30대 직장 여성들을 중심으로 공연'문화 송년회가 자리 잡았다. 20일 송년회 행사를 가졌던 직장인 김수정(34'여) 씨는 "동료들이 술을 별로 즐기지 않아 팀장에게 건의해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을 봤다. 직장에서 깐깐하던 팀장이 영화관람 중간 중간 훌쩍이는 것을 보고 인간미를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2040 미래연구소 직원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술자리 송년회 대신 단체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도건우 소장은 "지난해 직원들과 함께 해맞이 여행을 떠났는데 반응이 좋았다. 이번에도 31일 송년회와 신년회를 겸해 연극 한 편을 보고 난 후 포항 등지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전했다.
대구백화점 임직원 및 협력사원은 연말 송년회 대신 뮤지컬을 관람하며 친목을 다졌다. 6일부터 총 5차례에 걸쳐 본사 직원과 브랜드 매니저 등 총 1천여 명이 오페라하우스에서 진행하는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을 관람했다. 자칫 잦은 술자리로 의미 없이 보낼 수 있는 연말 모임을 인기 뮤지컬 관람으로 대체함으로써 직원들이 보다 품격 있고 소중한 시간을 가지게 됐다. 사운드 오브 뮤직 공연팀도 환영 플래카드를 붙여서 이들을 반겼다. 구승본 대구백화점 경영지원실 이사는 "먹고 마시는 것이 전부인 송년회 대신 뮤지컬 관람을 통해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바쁘게 보낸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할 수 있도록 행사를 준비했다"고 소개했다.
농협은행 칠곡지점 임직원들도 12일 김밥'햄버거로 간단히 저녁을 먹고 계명아트센터에서 뮤지컬 '명성황후'를 관람하는 송년회를 가졌다. 남정훈 농협은행 칠곡지점 과장은 "서울에서 근무할 때는 문화행사로 송년회를 대신하는 일이 흔했는데 대구에서는 아직 이런 송년회가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문화예술계도 이 같은 분위기를 겨냥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예술단체와 공연장 등은 이달 들어 각종 콘서트나 연극, 뮤지컬 등을 집중 배치하고 문화송년회를 찾는 직장과 가족 등 단체 관람객을 대상으로 '환영 플래카드'를 내거는 등 홍보에 나서고 있다. 여행업계도 송년회 관련 상품들을 쏟아내고 있다. '여행과 문화' '대구 답사마당' '재밌는 여행' 등 지역 여행사들도 송년회를 겸한 여행을 떠나려는 사람들을 위해 새해 해맞이 여행 상품을 내놓고 있다. 이상훈 자유투어 차장은 "연말 과음에 시달리기보다는 여행 등을 통해 새해를 설계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여행업계에서는 이를 새로운 성수기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임직원이 서로에게 편지나 음식을 대접하거나 준비한 장기자랑으로 동료와 가족을 접대하는 이색 송년회도 열리고 있다. 동아백화점은 26, 27일 김밥'편지 송년회를 연다. 임직원들이 서로에게 김밥을 말아주고 편지를 전달하며 동료애를 나눈다. LG디스플레이 구미공장은 19일 임직원들과 가족들을 대상으로 '송년 樂 페스티벌'로 한해를 갈무리했다. 경상북도는 13일 도청강당에서 '산타의 밤' 행사를 개최했다. 도청어린이집 원아들의 미술작품 전시와 바이올린, 첼로 등 악기 연주, 노래와 율동으로 1년간 배운 솜씨를 뽐내며 직원들의 피로를 씻어 주었다.
◆형식'장소 파괴
송년회의 성격이 바뀌다 보니 형식과 장소도 각양각색. 로즈마리병원의 올해 송년 모임 장소는 음식점이나 술집이 아니었다. 14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팔공산으로 캠핑을 떠났다. 이곳에서 1년 동안의 발자취를 담은 동영상을 시청하고 직원들이 타임캡슐을 심는 행사를 가졌다. 다 함께 바비큐 파티를 하고, 불꽃놀이를 하며 한 해 동안 감사했던 마음을 서로에게 전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병원 김종원 기획실장은 "단순히 술만 마시는 송년회를 탈피하기 위해 장소를 팔공산으로 정했다. 부서 간, 직원 간 소통과 화합을 높이는 계기됐다"고 밝혔다.
대구의 여행동호회인 한가람회는 지난해부터 송년 모임 형식을 바꿨다. 매년 순번을 정해 회원 집을 가족과 함께 방문, 송년회를 열고 있다. 각자 만든 음식을 가져가 회원 집에서 파티를 즐기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호텔 연회장은 울상이다. 지역 호텔들의 예약률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감소했다. 예약 건수는 물론 규모도 줄고 있다. 호텔 관계자는 "송년회 문의가 뜸하다. 지난해의 경우 대선 등의 영향으로 행사를 자제하는 분위기였는데 올해는 호텔 등에서 송년회 하는 분위기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반면 연말 모임장소로 샐러드바를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패밀리레스토랑의 인기가 높다. 가족이나 직장인들이 소규모로 찾기 때문이다. 와인바 등을 이용해 송년회를 갖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직장인 장양미(43'여) 씨는 "며칠 전 부서 송년회를 라운지 바에서 가졌다. 보통 술자리는 마시자 분위기여서 부담이 많았는데 술을 많이 마시지 않고도 분위기를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고 했다.
◆'착한 송년회'
'착한 송년회'도 늘었다. 먹고 마시는 송년회 대신 기부나 봉사활동 등 의미 있는 행사로 대체하는 기업이나 관공서도 적지 않다. 화성산업은 떠들썩한 송년회를 버리고 각 본부 및 팀별로 간단한 다과회로 차분히 연말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또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사랑의 연탄나눔행사와 사랑의 1천 가구 집수리 봉사로 어려운 이웃에게 따뜻함을 전할 예정이다.
롯데백화점 대구점과 상인점, 영플라자점은 송년회 대신 이웃과 정을 나누는 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 12월 한 달 동안 임직원 자선바자회, 사랑의 연탄 배달, 직원 가족 모금 활동, 사랑의 간식판매 등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한 수익금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할 예정이다. 서충환 팀장은 "특성상 여직원들이 많다 보니 부어라 마셔라 대신 봉사하는 송년회를 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했다.
경북농민축산은 송년 모임 대신 소고기 등 자사 생산품들을 복지시설과 저소득층 가정에 전달하는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손창민 대표는 "남아도는 물량을 직원들이 구입하고 그 수익금을 기부할 예정이다"고 했다.
영남이공대 입학처 직원 8명도 송년회 경비를 아껴 보육원에서 '산타 파티'를 열기로 했다. 직원들이 직접 산타클로스 복장을 하고 선물을 사서 아이들에게 나눠줄 계획이다. 삼성전자 구미공장은 송년회 대신, 쪽방 봉사활동, 청소년 초청 뮤지컬 공연 등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있다. 전석장애인복지스포츠센터 최창덕 소장은 "연말연시를 맞아 돈이나 상품 기부 대신에 봉사활동을 하면서 송년회를 복지시설에서 갖는 단체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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