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그림자의 춤/앨리스 먼로 지음/곽명단 옮김/뿔 펴냄
2013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앨리스 먼로의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그녀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 전인 2010년 5월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됐으며, 최근 2쇄를 발행했다. 먼로의 첫 번째 단편집으로 캐나다에서는 1968년 출판됐다.
앨리스 먼로 역시 초기에는 책을 출판할 곳을 찾지 못해 출판사를 전전했다. 이 책을 시작으로 캐나다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인 총독문학상을 수상했고, 상당한 독자를 확보했다. 그녀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는데도 이 책에 실린 단편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졌다.
이 소설집에는 모두 15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1931년생 여성 작가가 19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캐나다 여성을 둘러싼 사회, 캐나다 어린이를 둘러싼 상황을 그린 작품인 만큼 우리에게는 '낯설다기보다 흘러간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빠른 속도로 서구화됐다는 방증인지도 모를 일이다. 충격과 재미를 기대하는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지은이는 한 인터뷰에서 '작품을 실은 순서는 아무 의미가 없고, 각 작품은 여러 사람이 겪은 각기 다른 경험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체로 여성들의 이야기이며, 성장소설 혹은 여성의 일대기처럼 보인다.
단편 '작업실'은 어느 날 자기만의 작업실을 갖게 된 '작가 지망생 주부'가 맞닥뜨린 상황이다. 자기만의 공간을 찾았지만, 자기만의 공간이 되어주지 못하는 작업실, 혼자만의 공간인 줄 알았는데, 세상과 주변의 눈이 지나칠 정도로 집요하게 간섭을 행하는 작업실은 '당시 여성의 현실'이자 세상의 얼굴이기도 하다.
다른 작품 '나비의 나날'은 폐쇄된 사회에서 음흉하고 간교하게 세상을 열어가는 사춘기 여자 아이들의 이야기다. 이 작품의 화자인 헬렌을 비롯해 주변부에 위치한 여학생 마이라, 여학생 무리의 리더 격인 글래디스 등 어느 한 사람도 어여쁜 소녀처럼 와 닿지 않는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그녀들은 자신이 '관계'에서 배제될까 두려워하며, 한 명을 찍어서 배제하고, 배제된 학생 역시 자기만의 방식으로 우월감을 표시한다.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는 아버지를 위한 노래다. 경제 공황의 직격탄을 맞아 생업이었던 여우농장을 잃고, '워커브라더스'라는 회사의 외판원이 된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물건을 팔러 갔다가 오줌 세례까지 받는 신세지만, 집에서는 사려 깊은 남편이고 자상한 아버지다. 엄마는 아버지를 언제나 샌님이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의약품 회사 외판원이 되어 뙤약볕 속을 다니지만 맑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어쩌다가 이렇게 사느냐는 옛 친구의 말에 아버지는 "이걸로 궁기는 면해. 궁기란 놈의 발을 뒤뜰 울타리 밖에 묶어둔 셈이지"라고 답한다.
아버지의 외판길에 따라나섰던 나는 이제껏 발견하지 못한 아버지를 발견한다. 아버지는 여자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춤을 잘 췄으며, 유쾌한 농담을 잘했던 사람이다. 엄마는 아버지가 위스키를 입에도 대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지만, 아버지는 위스키도 잘 마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어리둥절하고 낯설게 변한' 아버지의 삶을 더듬는다. 마치 마술을 부리는 풍경처럼.
날씨처럼 아버지의 삶도 변화무쌍했으리라. 내가 태어난 이래 보아서 알고 있는 아버지만이 내 아버지의 전부는 아니었다.
이 책의 표제작이자 마지막에 실린 작품 '행복한 그림자의 춤'은 지은이가 소설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궁극의 뜻을 보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마을에서 오랜 세월 피아노 과외 선생님으로 활동해온 마살레스 선생님은 매년 자신의 집에서 음악이 흐르는 파티를 연다. 그러나 그녀의 집이 비좁고 더러우며, 차린 음식도 변변치 않아 초대받은 사람들은 거절할 명분 찾기에 급급하다. 그럼에도 몇몇은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매년 파티에 참석한다.
올해 파티에는 사람들이 더욱 줄었다. 파티가 시작되고 올 사람은 다 왔는데, 마살레스 선생님은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다. 음식은 이미 식었고, 뚜껑을 닫지 않은 요리엔 파리가 앉았고, 차가워야 할 음료는 밍밍해졌다.
그때 한 무리의 아이들이 집으로 들어온다. 똑같은 옷을 입은 아이들이다. 모두 (장애아동들이 다니는) 근처의 '그린 힐' 학교 학생들로 마살레스 선생님이 가르치는 아이들이다. 그들의 연주는 물론 엉망이다. 파티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수런댄다.
'그럼요, 저런 아이들에게 혐오감을 느끼는 건 옳지도 않고, 나는 혐오감도 없지만, 지적장애아들의 연주를 들으러 오라는 말은 아무한테도 듣지 못했다고요.' 그들의 박수는 갈수록 커진다. 이것으로 끝이겠지 하는 바람을 담고.
마살레스 선생님은 배우는 아이들이 갈수록 줄어드는 피아노를 가르치며, 조금씩 조금씩 변두리로 밀려나며 살아간다. 그녀는 장애아들의 연주를 들려주면서 '어른들도 한때는 깨끗하고 순수한 어린아이였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409쪽, 1만2천원.
조두진기자 earfu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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