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만 켜면 맛의 향연이 펼쳐진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봐도 먹고 또 먹는다. '후루룩 짭짭' 소리만 들어도 기분이 좋다. 침이 마를 틈이 없다. 자칫 배고픈 상태로 TV를 보다가는 금세 허기가 진다. 시사'교양 프로그램도 예외는 아니다. 잘못된 식습관을 지적하는 MC가 스튜디오에 차려진 요리를 먹고 미심쩍은 식당을 고발하면서도 이 말만은 빠뜨리지 않는다.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먹방'(먹는 방송)이 생활 속으로 진격 중이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먹는 장면을 찍어 카톡이나 유튜브에 올리고 이를 보며 즐기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안방극장 점령
'먹방'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TV 예능프로그램을 점령한데 이어 다큐멘터리, 서바이벌 오디션, 드라마까지 진출하며 방송가를 주름잡고 있다. 예능분야에서는 MBC의 '아빠! 어디가?', '진짜사나이'' KBS '해피투게더 야간매점'이 대표적이다. 다큐멘터리는 '만두명가', 서바이벌 오디션 '한식대첩', 드라마 경우 tvN '응답하라 1994', '식샤를 합시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들 먹방 프로그램은 시청자들의 허기진 마음을 달래주며 장르를 불문하고 인기를 모으고 있다. 시즌2를 맞은 tvN '꽃보다 누나'는 지난달 29일 첫 방송부터 시청률 10%대(이하 닐슨코리아 제공)를 돌파했다. 김희애의 '먹방'이 큰몫을 했다. 이달 20일 방송에서는 김희애가 먹는 것을 두고 스태프들에게 짜증을 내는 모습이 방송돼 큰 인기를 얻었다.
'진짜 사나이'는 대한민국 군대를 직접 체험하며 대표적인 군대 음식인 '군대리아'(햄버거)를 민간에 유행시켰다. '해피투게더 야간매점'에서는 스타가 자신만의 요리법으로 만든 음식과 그 안에 담긴 사연이 소개돼 인기를 끌었다.
다큐멘터리에도 먹방이 등장했다. 최근 전파를 탄 '만두명가'에서는 배우 김성수와 한식 전문 요리사 권우중이 우리나라의 다양한 만두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소개했다. 탤런트 최불암이 전국을 돌며 맛집을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인기다. 매주 토요일 오후 10시에 방송하는 국내 최초 한식 서바이벌 '한식대첩'은 국내 최초 한식 지역연고 서바이벌 프로그램. 전국을 대표하는 요리 고수들이 참가해 지역의 자존심을 걸고 요리대결을 펼친다.
본격 먹방 드라마도 전파를 탔다.'1인 가구'와 '먹방'을 소재로 한 tvN 1인 가구 드라마 '식샤를 합시다'. 혼자 살아서 더 배고프고, 더 외로운 사람들의 로맨스와 식생활 이야기를 군침 돋게 그려내고 있다. 인터넷 방송 '아프리카'에서는 일반인들이 먹방을 진행하고 있다.
CF계도 먹방이 장악했다. 올해 대세 스타들은 대부분 '먹는 CF'를 찍었다. MBC 예능프로그램 '아빠! 어디가?'에 출연한 다섯 명의 아이들은 뜨거운 인기를 반영이라도 하듯 줄줄이 CF에 동반 캐스팅됐다. 같은 프로그램인 '진짜 사나이'를 통해 아기 병사로 거듭난 박형식 역시 CF계에서 러브콜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는 함께 출연하는 배우 류수영과 함께 라면 광고를 촬영했다. 요즘 최고의 대세 스타인 tvN '응답하라 1994'의 삼천포 김성균과 해태 손호준도 먹방 CF스타에 이름을 올렸다.
박기웅 대중문화평론가는 "음식이 풍요로워졌지만 1인 가구의 증가, 비만에 대한 염려 등으로 마음껏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다. 혼자서도 맛있게 먹는 장면이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을 안기며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반인들도 먹방에 가세
23일 오후. 대구 동구 신암동에 있는 음식점 '그날'. 소주잔이 높이 올라갔다. 삼겹살을 비롯해 막창, 꼬막 등 음식들이 줄지어 나왔다. 먹자계의 일종인 '애돈회'의 번개팅 자리였다. 평소 삼겹살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동호회로 최근 인터넷을 통해 결성됐다. 공무원도 있고 은행원, 회사원, 의사, 경찰관 등 직업도 다양하다.
동호회 회원들의 미식탐험은 요즘 먹방들이 울고 갈 수준. 하루 저녁에 3, 4차까지 가는 일은 예사다. 삼겹살집은 물론 냉면, 칼국수 집도 마다하지 않는다. 소방공무원인 박희정 씨는 "학연이나 지연, 이념에 따라 모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밥을 같이 먹은 인연으로 모였다"고 했다.
동호회 수준은 아니더라도 TV 속 먹방을 직접 맛보고 즐기는 일반인들도 늘고 있다. 자취생활 3년째인 직장인 김연수(28'가명) 씨. 65㎏이던 체중이 최근 1년 사이 10㎏ 이상 불었다. 나름 운동도 열심히 하고 다이어트도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김 씨는 종종 온라인 방송인 아프리카TV의 먹방을 보며 식사를 한다.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 BJ가 컴퓨터 앞에 피자, 족발, 보쌈, 중국음식 등 배달음식을 펼쳐놓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침이 고인단다. "먹방을 보다보면 참을 수 없는 식욕이 느껴집니다. 가끔 땀을 뚝뚝 흘리며 입이 미어져라 가득 밀어 넣는 내 모습이 싫을 때도 있습니다."
주부 장미영(43'가명) 씨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찍어 SNS에 올리는 것. 요리를 위한 레시피 등은 카친(카카오스토리 친구)들을 위한 서비스다. 혼자서는 도저히 다 먹을 수 없는 양을 처리하는 것은 순전히 가족들 몫이다. 가끔 외식이라도 하는 날이면 푸짐하게 차려진 밥상을 향해 셔터를 누르기 전까지 가족들이 수저를 들지 못하게 할 정도다.
먹방 출연이 직업인 사람도 있다. 아프리카TV에서는 먹방이 직업인 사람이 다수 등장한다. 인기 있는 먹방 출연자는 수많은 팬층을 확보하고 있으며, 연예인 이상의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이 방송의 한 출연자는 "후루룩 쩝쩝과 같이 먹는 소리는 되도록 요란하게 하고, 먹고 있는 음식에 대한 표현과 감탄사는 끊이질 않아야 한다. 최대한 우악스럽게 먹고 과도한 감정표현을 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마케팅의 핵심 소재
마케팅 분야에서도 주된 소재로 등장했다. 먹방을 가장 먼저 활용한 곳은 축구계. 인천 유나이티드는 얼마 전 김봉길 감독과 팬들의 저녁 데이트 이벤트를 기획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이벤트 신청을 한 사람들 중 3명이 김 감독과 외식을 했다. 제주 유나이티드는 지난해부터 실시한 먹거리 이벤트를 올해까지 이어오고 있다. 창단 30주년을 맞은 지난해엔 창단 해(1982년)를 따 경기장을 찾는 선착순 1천982명에게 공짜 음식을 줬고 올해는 2013시즌에 맞게 음식을 나눠주는 팬 숫자를 2천13명으로 늘렸다.
나눠주는 음식엔 스토리도 있다. 제주 유나이티드는 수원 삼성과 경기를 할 땐 수원의 상징인 '새'에 맞춰 닭 날개를 나눠줬다. 수원의 팀 이름이 '수원 블루윙즈'라서 팬 사이에서는 '닭을 먹고 수원을 이기자'는 응원을 종종 해왔다. 제주는 또 강원 FC와 경기를 할 때는 이벤트 음식을 강원의 상징인 감자로 정했다. 감자를 먹고 강원FC를 이기자는 의미다. 제주 유나이티드 관계자는 "제주 축구팬들 사이에선 '축구장엔 가면 뭘 준다더라'라는 얘기가 자연스레 화제에 올랐다. 당첨 확률이 낮은 경품 행사를 하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눌 수 있는 음식이 훨씬 효과적이다"고 했다. FC서울도 지난 5월 베이징과의 ACL(아시아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을 치를 때 베이징 덕과 짜장면을 준비해 팬들을 맞았다.
기업들도 먹을 것을 내세워 소통하고 있다. 한화그룹의 경우 CEO와 직원들이 격의 없이 수박 등을 나눠 먹는 소통이 계열사 간 릴레이처럼 이어지고 있다. 방한홍 한화케미칼 대표가 지난여름 '수박데이'를 연 것이 시작이다. 방 대표의 경우 자비로 300여 통의 수박을 사서 전국 사업장에 나눠주는 통 큰 한턱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역에서도 '먹방' 모임이 잇따르고 있다. 농협은행 칠곡지점 임직원들도 12일 김밥'햄버거로 저녁을 먹으며 송년회를 대신했다. 로즈마리병원 14일부터 1박 2일간 팔공산의 한 리조트에 모여 바비큐 파티를 벌이고 있다. 동아백화점은 26, 27일 김밥 송년회를 열었다. 임직원들이 서로에게 김밥을 말아주면서 소통의 시간을 가졌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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