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밑줄 쫙∼ 대구 역사유물](1)대구에도 구석기인이? 월성동 유적

5cm 좀돌날, 대구 2만년의 역사

월성동 유적에서 발굴된 좀돌날. 후기 구석기 유물을 대표하는 좀돌날은 날카로운 단면을 가진 돌조각들로 요즘 커터칼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나무 가죽을 벗길 때, 짐승 가죽과 살을 분리할 때, 물고기를 손질할 때, 옷감을 재단할 때 유용하게 쓰였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후기 구석기 유물관 메인 박스에 전시될 정도로 고고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유물이다. 경북도문화재연구원 제공
월성동 유적에서 발굴된 좀돌날. 후기 구석기 유물을 대표하는 좀돌날은 날카로운 단면을 가진 돌조각들로 요즘 커터칼을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나무 가죽을 벗길 때, 짐승 가죽과 살을 분리할 때, 물고기를 손질할 때, 옷감을 재단할 때 유용하게 쓰였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후기 구석기 유물관 메인 박스에 전시될 정도로 고고학적으로 가치가 있는 유물이다. 경북도문화재연구원 제공

2만 년 전 백두산이나 일본 규슈에서 생산된 흑요석이 대구에서 발견된 사실을 아십니까?

아, 참! 대구 달서구 월성동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견된 일은요.

동서변동, 상동에서 신석기시대 대표 유물인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기도 했지요.

대구에는 고대사 미스터리가 무척 많답니다.

중국 한대(漢代) 구리거울이 대구 한복판에서 출토되고, 달성군 평촌리에서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전신(全身) 인골이 나왔습니다.

북구 동천동에서는 한국 고고학 최초로 선사시대 우물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대구는 선사유적의 종합선물세트장이라고 할 만큼 다양한 유적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연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 교과서에도 안 나오는 것들이 대부분이지요.

대구 고고학의 비밀 속으로 출발해 볼까요.

(1)대구에도 구석기인이? 월성동 유적

2006년 7월 대구 월성동 발굴지에서는 긴장감이 흘렀다. 현장에서 긴급 지도위원회가 소집됐다. 박영복 조사단장, 이청규 교수(영남대 문화인류학과)를 비롯해 지도위원들과 조사원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발굴장에서 연구원들 간 중간 토의는 의례적인 일이지만 이날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유적지에서 좀돌날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좀돌날은 지름 5㎝ 이하 자갈돌로 후기 구석기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월성동에서 출토된 좀돌날은 모두 4천888편. 이 중에는 백두산 부근, 일본 규슈, 시베리아, 몽골에서만 출토되는 흑요석(黑曜石)도 있었다. 새기개, 찌르개 등 종류가 다양했고 돌들엔 성형(成形)이 분명하고 인공의 흔적이 뚜렷했다. 대구에서 구석기의 존재 가능성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대구 역사를 2만 년 끌어올린 월성동 유적

대구엔 언제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을까.

1980년대까지만 해도 대구엔 청동기 후반기에 사람들이 거주한 것으로 보았다. 북구 산격동 연암산과 침산의 발굴 성과가 이를 뒷받침했다.

그러나 1998년 북구 서변동과 수성구 상동에서 빗살무늬 토기가 출토되면서 학계는 흥분했다. 대구 역사를 5천 년 이상 소급시킬 획기적인 사건이었기 때문. 이 발굴로 대구는 연대를 반(半)만년을 거슬러 신석기인들의 거주 공간으로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정설로 굳어질 것처럼 여겨졌던 이 학설도 2000년 수성구 파동 '그늘바위' 유적에서 구석기 시대 토층과 인공이 가해진 자갈돌이 발견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대구지역에서 최초로 구석기인의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출토자료도 한두 점에 그치고 유물의 해석에도 한계가 있다.

경북문화재연구원(이하 경문연'이사장 박재홍)의 김광명 연구원은 "월성동 유적지는 파동 바위 그늘 유적과 함께 대구 역사를 2만 년 전까지 상한(上限)시키는 단초를 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평가했다.

◆흑요석, 좀돌날 등 스타급 유물 발굴

월성동 유적지는 행정구역상 달서구 월성동 777-2번지로 금호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월배선상지 북서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남대구톨게이트 월암초교 근처, 월성월드메리디앙 아파트 자리.

시굴조사 결과 철기시대 토광묘, 청동기시대 주거지, 통일신라시대 건물지가 같이 확인되었다. 한 공간에 세 시기의 문화가 동거(同居)했던 셈이다.

당시 출토된 구석기 유물은 1만3천175점으로 긁개, 새기개, 찌르개, 좀돌날, 세석기와 많은 박편들이 포함되었다.

전문가들은 유물들 중 망치돌, 몸돌, 격지(박편석기)가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석기 제작의 전 공정이 망라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석기제작장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유물에도 옥석(玉石)이 있다. 일부 유물은 고고학의 한 시기를 구획하는 결정적 자료로 작용하기도 한다. 월성동 유적에서 스타급 유물은 단연 흑요석과 좀돌날이다. 좀돌날은 슴베찌르개(자루가 있는 돌칼)와 함께 후기 구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지표 유적이다.

경문연의 이동철 연구원은 "좀돌날은 요즘의 커터칼을 생각하면 쉽다"며 "나무껍질을 벗길 때나 가죽과 고기를 분리할 때, 물고기를 손질할 때 유용하게 쓰인다"고 조언한다.

이 좀돌날은 일본,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골고루 출토되기 때문에 동북아의 구석기 문화 전파경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일반적으로 러시아 아르탄강, 시베리아, 몽골 일대에서 제작된 석기들의 제작연대가 한반도보다 빠르기 때문에 북방민족의 남하, 이주 과정에서 좀돌날 문화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흑요석은 다음 회에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한다.)

◆대구도 이젠 고대 문명지 중의 하나

파동 그늘바위, 월성동 유적이 지역의 구석기 존재 가능성을 처음으로 열었지만 후속 발굴이나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유적 유물의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아직은 미약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대구에서 구석기 유물이 추가로 발굴된다면 금호강과 신천 주변이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주변에 들을 끼고 있어 농업에 적합한 데다 어로, 수렵에도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조만간 제2의 좀돌날, 제3의 구석기 유적이 발굴될 것도 기대된다.

어쨌든 이 돌조각들은 조그만 날을 세워 대구의 역사를 2만 년이나 베어냈다. 가죽을 벗기던 돌조각이 세월의 토층을 벗겨 내고 구석기 출현을 알리는 지표유적이 되었다.

이 돌멩이 덕분에 지역 고고학계도 이젠 당당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대구도 한반도 문명의 출발지 중 하나였다고."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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