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이 밝았다. 작년에 영화관객이 2억 명을 넘어섰는데, 이는 전 국민이 연간 4편 이상의 영화를 극장에서 본다는 놀라운 수치다. 텔레비전으로 안방극장이 열리기 이전인 1960년대의 기록에 근접한 수치다. 그때는 영화 말고는 다른 오락물을 찾을 수 없는 시대였지만, 지금 한국영화는 텔레비전과 인터넷과의 경쟁에도 계속해서 건재하며 성장하고 있다. 세계 여느 나라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는 만듦새와 역량을 가진 한국영화의 힘에 박수를 보낸다. 현재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높이에서 우리의 현실과 열망을 잘 투영한 한국영화가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고, 이러한 영화들이 호응을 얻는 것은 영화인과 관객 모두에게 희망이다.
작년에 우리는 모두 '레미제라블'과 '7번방의 선물'을 보고 많이 울었고, 가난하고 비천한 곳에 관심을 표했으며, 또한 위로받았다. 지난여름과 가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의 틈바구니에서 큰 예산의 한국영화들이 잘 버텨주었고, 스케일이 큰 한국영화의 잠재력에 열광했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로운 계획을 세우는 이 시기엔 많은 이들이 나와 가족, 그리고 이웃을 돌아보고, 나아가 사회의 공공선이라는 것에 관심을 드러낸다. '변호인'이 이미 개봉 2주일도 되기 전에 500만 명 관객을 넘어섰다. 이 영화는 곧 각종 한국영화 기록을 갈아치우게 될 것이다.
과거 어느 한때의 이야기이지만 사회의 불의에 직면한 한 인물의 경험담을 담은 '변호인'의 흥행은 물론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적은 수의 스크린을 할당받았지만 선전하고 있는, 작지만 강렬한 영화들의 면면을 다시금 확인해보자.
방은진 감독, 전도연 주연의 '집으로 가는 길'은 '변호인'이라는 강한 상대를 만나 고전하고 있지만, 이 영화는 결코 그냥 보낼 영화가 아니다. 전도연이라는 당대 최고 여배우 레테르만으로도 영화를 볼 이유는 충분하다. 범죄인도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더군다나 그녀가 의도와 상관없이 우연히 범죄에 연루된 경우라면 더더욱 이 영화는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가난하고 비천해도 가족을 지키고 행복을 추구해야 할 권리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재벌의 사랑놀이로 끝없이 화려해지고 가난하고 없는 자들의 현실에 눈을 감고 있으니, 영화가 평범한 이들의 특별한 이야기에 계속해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생활 연기와 멜로드라마의 극적 분노를 모두 잘 표현하는 전도연의 연기는, 우연히 마약 운반책으로 오인되어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마르티니크 감옥에 수용되고 프랑스 법정에 선, 한 대한민국 주부가 겪은 고난에 찬 처절한 실화를 풍부한 드라마로 그려낸 절대적 에너지다. 배우에서 감독으로 성공적으로 안착한 방은진이라는 여성감독의 앞으로의 행보를 기대해봐도 좋을 듯하다.
잔잔하게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일본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도 꼭 놓치지 말아야 할 영화다. 지난해 칸느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장인 스티븐 스필버그의 절대적 지지 하에 심사위원상을 받은 명성에 걸맞은 감동과 여운을 전한다. 이 영화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두 부부는 여섯 살 난 아들이 뒤바뀐 사실을 병원 측으로부터 통보받는다. 한 부부는 살얼음판 같은 경쟁에서 살아남은 도쿄의 여피족이며, 또 한 부부는 도시 근교에서 전파상을 운영하며 많은 아이들을 낳고 느리고 평화롭게 살아간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교육관을 가진 두 부부는 친아들과 기른 아들 사이에서 갈등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장점은 눈물과 분노로 통곡하지 않고, 조용하게 현 사태를 응시하고, 아이들로 인해 자신들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이다.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는 일본영화가 우리나라만큼의 활력을 가지지 못하고 생기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지만, 영화를 통해 인생 전체를 생각하게 하는 관조하고 성찰하는 작품이 계속해서 만들어지면서, '과연 일본영화'라는 감탄을 하게 만든다.
또 한 편의 주목할 만한 영화는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이다. 지난해 칸느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로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함으로써 일약 이란 출신의 세계적 거장으로 떠오른 아쉬가르 파르하디가 프랑스에서 만든 작품이다. 그는 키아로스타미나 마흐발바프 감독의 서정주의 이란영화들과 달리, 일상의 사소한 사건 속에서 미스터리를 엮어내는 뛰어난 이야기꾼이다. 원제는 '과거'. 이란 남자 아마드는 프랑스인 아내 마리와 이혼하기 위해 테헤란에서 프랑스로 간다. 그들의 집에는 이미 마리와 결혼을 약속한 또 다른 아랍 남자 사미르가 있고, 그에게는 자살을 시도하다 의식불명에 빠진 아내 셀린이 있다. 마리는 벨기에인인 전 남편 사이에서 난 두 딸을 기르며, 사미르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10대인 큰딸 루시는 자꾸만 엇나가는데, 그 이유는 사미르의 아내 셀린의 의식불명과 관계가 있다.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양파껍질 벗기듯이 하나하나 펼쳐보이는 파르하디 특유의 방식을 영화는 잘 보여준다. 각각의 미스터리가 풀리며 각 인물들의 현재가 이해된다. 인물들은 모두 악인이며, 모두 어쩔 수 없었고, 모두 상처받는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지만, 과거가 모든 걸 지배해서는 안 된다.
가족과의 대화, 관심, 그리고 이해, 이것들이라면 충분히 살아갈 만하다. 누구나 상처받고 위안받고 싶은 지금, 가족이 있고, 이웃이 있고, 그리고 우리 모두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공공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영화들은 이러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메시지를 통해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풍요로운 올겨울 영화계 풍경이다.
정민아 영화평론가'yedam98@hanmail.net
*광운대 강성률 교수가 맡아오던 '줌인' 대신 2014년부터는 영화평론가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을 연재합니다. 정민아 영화평론가는 영화학 박사로 EBS 영화프로그램 자문위원과 한국영화학회 학술이사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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