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안 심의 때마다 나타났던 '쪽지예산' 논란이 지난해 연말에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쪽지예산'은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의원들이 지역구 관련 예산이나 선심성 예산을 회의 도중 쪽지로 밀어넣는 데서 나온 말이다. 최근에는 휴대전화 문자는 물론이고, 카카오톡으로 부탁을 하기도 해서 '카톡예산' 'SNS예산'이라는 말도 나올 정도다.
◆나눠먹기 관행, 올해도 여전
쪽지예산 얘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헌정 사상 최초로 해를 넘겨 예산안을 처리했던 지난해 국회는 역대 최대 규모의 쪽지예산 처리로 또 하나의 불명예를 안았다. 2012년 예산 정국에서 여야 지도부와 국회 예결위'상임위 소속 의원들을 통해 전달된 쪽지는 무려 4천500건에 이르렀다. 당시 국회 관계자는 "예년에도 2천~3천 건의 쪽지가 있었지만, 이번이 최대 규모일 것"이라고 했고, 일부 예결위원들은 "쪽지예산을 처리하느라 예산 심의가 방해'지연'왜곡되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예결위 계수조정소위 일부 의원과 정부 관계자들은 쪽지 민원이 전달되는 것을 막으려고 서울 여의도 한 호텔에서 1주일 정도 비공개 심사를 하기도 했다. '활발한 쪽지 민원 덕분에' 각 지역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은 정부안보다 5천574억원 늘었고, 대신 기초생활보호대상자에 돌아갈 몫은 2천800억여원이 줄었다.
지난해도 '쪽지예산'은 불씨로 작용했다. 예년보다는 덜했다는 평가가 다수지만, 꼼수는 있었다. 1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예산안을 살펴보면 18대 국회 때처럼 '고위 당직자' '실세' 의원이 수천억원을 챙긴 경우는 눈에 띄지 않았지만 '쪽지예산 나눠 먹기'로 예산을 챙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공사비가 수천억원에 달하는 SOC 사업을 시작하도록 일단 기본 용역'설계비로 수억원 단위의 예산을 챙긴 다음, 이듬해에도 '계속 사업'으로 진행하도록 한 것.
쪼개진 SOC 사업 예산은 생태하천이나 자전거도로, 도보길 등을 건설하는 하천정비사업 등에 10억원 이하로 배정됐다. 정부 예산안엔 없었던 신규 사업도 이런 식으로 이뤄졌다. 경기 여주~원주 복선전철(12억원), 수도권광역급행철도(100억원) 대전 관저~문창 도로건설(30억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애초 정부 예산안에 없었다. 광역급행철도 사업은 지난해에도 100억원이 반영됐지만 예비타당성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결과가 긍정적으로 나오면 기본계획에 들어가도록 경기도 지역구 의원들이 힘을 합쳐 결과를 내놨다.
지역에서는 예결위 예산안조정소위 류성걸 의원(대구 동갑)이 대구 도심 복개와 동대구역 고가교에 362억원을 배정했고, 대구도시철도 1호선 연장 사업은 본회의에서 구설에 올랐다. 최경환 새누리당 원내대표(경산청도)가 논란에 휘말려 해명까지 하는 등 대표적인 쪽지예산 사례처럼 부각됐다.
◆왜 되풀이되는가, 나쁘기만 한 건가
지역구 의원들이 지역 여론과 득표 등을 의식해 혈세를 낭비한다는 비판 여론에도 쪽지예산 관행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중앙 정치권에서 비판을 받을 것이 뻔하지만, '지역 이익을 위해 앞장섰다'는 점에선 '치적'을 홍보할 수 있는 더없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매년 초 있을 의정보고에서도 쪽지예산 성과는 유용한 홍보수단이 된다. 이 때문에 지역구 의원들은 예산안이 통과되자마자 앞다투어 '막판 증액 성공' '지역구 예산 확보' 등을 내용으로 하는 보도자료를 내고 있다.
갑(甲) 중의 갑(甲)으로 불리는 예결위 예산안조정소위 위원들은 이 시기가 '홍보 최적기'다. 민주당 예결위 예산조정소위 위원인 윤관석 의원은 1일 "인천아시안게임 예산 476억원을 증액했다"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그러자 사업을 공동으로 추진했던 인천 지역 의원들은 서로 "내가 확보했다"며 지적하고 나서기도 했다.
무분별한 쪽지예산을 근절하자고 한 예결위원은 입장이 난처해지기도 한다. 지역 한 재선 의원은 동료 예결위원을 찾아가 "지역구 예산을 꼭 챙겨달라고 했는데 빠져서 서운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고 한다.
어느 지역 출신 의원이 당직을 맡고 있는지도 관심사다. 최 원내대표가 신상발언까지 하면서 해명을 하는 것을 두고, 일각에선 "알 만한 사람들이 저렇게까지 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말도 나온다. 여당 원내대표에 거는 기대 수준에 부응해야 한다는 옹호론이다.
지자체도 쪽지예산 성과를 반기고 있다. 1원이라도 예산을 늘려보려는 지자체의 노력이 더해진 결과라는 점에서다. 이처럼 쪽지예산이 필요한 사업도 있다. 지역구 의원과 지자체가 합심한 덕분에 대구 3조원, 경북 10조원을 넘는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고, SOC 예산 삭감으로 곤경에 처할 뻔했던 경북북부지역은 정치권의 노력으로 해당 예산을 지켜내 '최소한의 복지 달성'을 이룰 전망이다. 국토부 한 관계자도 "쪽지예산이 지역 정치인들의 잇속만 챙기는 수단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지만, 그중에는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사업들도 있기 때문에 무조건 비판만 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이지현기자 everyda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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