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윤희의 아담한 이야기] 정리의 기술

오랜만에 원고 쓸 일이 생겼다. 잘 쓰는 글도 아닌 데다 일 폭탄 속에 마감 임박 증후군처럼 소화불량까지 찾아왔다. 원고지를 펼쳐놓고 오늘은 숙제를 마쳐야지, 책상 앞에 앉았는데 연필 끝이 뭉뚝하다. 칼을 찾아들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연필을 정갈하게 깎고 보니 옆에 놓인 드로잉 북에 손이 갔다. 그림을 잘 그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머그잔을 쓱쓱 그려보았다. "아, 원고!" 다시 집중하려는데 이번엔 책상 위에 흐트러진 책들이 나를 부른다. 게다가 책꽂이 상태도 복잡하다. '제대로 분류되어 있지 않은 책꽂이는 불편하지!'라는 명분을 찾아낸다. 책꽂이의 책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 몰입한 내 손에는 책 몇 권이 쥐여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읽을 책을 고르고 있었던 것처럼. 지난 연말 어느 기업의 겨울호 사보에 소개하려고 준비했던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창의성의 즐거움'과 시인 백석(白石)의 '정본 백석 시집', '연필깎이의 정석'….

아주 자연스럽게 원고지를 밀쳐 놓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원고의 존재가 머릿속에서 지워진 것은 아니었다. 고도의 집중이 요구되는 일을 해야 할 때 그것과 상관없는 일들이 더 흥미로워질 때가 있다. 그 시간은 얼마나 달콤하고 맛있는지! 학창 시절에 시험 공부 기간이면 유독 간절한 것들이 많아지는 경험을 되살린다. 갑자기 한 편의 그림이 떠오른다. 아주 작고 아날로그한 어릴 적 내 방의 풍경이다. 세월이 한참이나 흘렀건만 마치 프루스트 현상(냄새를 통해 과거의 일을 기억해 내는 현상으로, 프랑스 작가 M. 프루스트의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유래)처럼 그 방 안의 냄새, 온도 같은 것들과 함께 오롯이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공부할 양으로 책상에 앉으면 그것에 집중하기까지 비교적 요란한 과정을 거쳤던 것 같다. 샤프심도 갈고, 서랍도 열고 닫았다가, 책꽂이도 건드렸다가… 나의 두 언니는 내가 공부하기 싫어서 딴전을 피우는 것이라고 했지만, 공부에 앞서 마음 정리가 먼저였던 내 방식을 존중해 주지 않는 그들이 야속할 따름이었다. 수학 문제집이나 영어 참고서로 내 몸과 마음이 돌아오는 길은 때때로 너무 멀고 복잡했다. 나의 관심은 수첩 기록이나 소설 읽기에 더 치우쳐 있었는데 적어도 그러한 관심이 또래의 아이들과는 다른 자아를 가졌다는 착각을 가져다주었고 남다른 자존감 같은 것도 느끼게 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의 편지글에 종종 인용했던 '독일인의 사랑', 나의 성장 일기에 수도 없이 옮겨 적었던 '데미안', '생의 한가운데' 등을 통해 내 청소년기의 흔들거림을 잡는 방법을 찾았을 터이다. 또한 인생의 목적어를 찾는 방식을 배웠던 것 같다.

그렇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시험 당일 아침 눈을 떴을 때 내 얼굴에 눌린 소설책은 더 이상 지난밤의 그 감동이 아니었다. 수첩에 빼곡히 적힌 글귀들이 시험을 순조롭게 만들어 주지도 않았다. 책 읽기로 보냈던 지난밤의 시간 또한 지금 내 마음의 평화를 흔들고 있다. 코앞에 닥친 데드라인은 나를 책상 앞으로 불러 앉혔지만 난 또 연필을 깎고 있다.

미루어 짐작건대 원고를 쓰는 일 년 내내 이 고약한 습관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원고 마감이 찾아오면 오래된 LP판을 닦는다거나 미완성인 채 밀쳐 놓았던 뜨개질을 한다거나 가족 앨범을 정리할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그리운 이에게 전화를 걸어 무심한 세월 이야기를 해댈지도 모른다. 그런들 어쩌랴. 새로운 숙제 앞에 또 다른 일을 만들고, 다시 벌여놓은 일들을 정리하는 이 아이러니한 일들의 반복이 이 패러독스한 시대를 사는 내 정리의 기술인 것을.

홍익포럼 대표 grapia-de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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