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역사 속의 인물] 을사오적 처단 외치며 죽은 첫 주미 대사 박정양

"을사오적을 사형에 처하소서."

1905년 11월 17일 체결된 을사늑약의 무효와 역적인 조약체결 매국 대신 즉 을사오적의 사형을 상주했던 박정양(朴定陽'1841~1905)은 같은 달 생을 마쳤다.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오는 등 개화에 눈을 뜨고 갑오개혁과 김홍집 내각에도 참여한 온건 개혁파로 근대화 정책으로 조선 개혁에 앞장섰다. 1887년 조선 첫 미국 대사로 파견돼 조선의 자주 독립국 승인을 요청했고, 미국은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이 아닌 동등한 외교국가로 인정했다. 조선 주재 청나라군 최고사령관 원세개의 방해로 몰래 미국으로 가야만 했던 그는 워싱턴 부임 뒤 클리블랜드 대통령을 예방, 수행원들과 큰절을 해 화제가 됐다.

1905년 오늘 대한제국 때의 입법기관인 중추원(中樞院'일제 조선총독부 설치 친일 자문기관인 중추원과 다름) 의장에 임명되는 등 그는 1866년 문과 급제 이후 형조판서, 이조참판, 호조판서, 내각총리대신, 학부대신 등 여러 관직을 맡아 조선의 개화를 위해 노력했다. 이어 그해 9월 표훈원(表勳院'표창과 상훈 업무담당) 최고책임자인 총재(總裁)에 임명됐으나 건강문제와 과로로 11월 14일 그만두고 물러났다. 그의 문하생인 월남 이상재를 비롯, 서재필과 윤치호 등 개화파 인사들을 후원했다. 사후 순종 때 문익(文翼)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984년 문집이 한글로 번역돼 발간됐다.

정인열 서울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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