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낭산은 신이 놀던 곳이라, 필자는 갑오년의 첫 햇살도 즐길 겸 그 산을 찾았다. 이 산은 일찍이 실성이사금 때부터 신이 노는 숲이라고 여긴, 누에처럼 생긴 산이다. 누에의 정수리를 따고 선덕여왕이 누워 있다. 필자는 오래전부터 역사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이 낭산을 신라예술공원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차를 철길 옆 선덕여왕릉 주차장에 댔다.
이제 사천왕사지 발굴이 끝난 것 같다. 사적비와 문무왕비를 세웠던 받침 거북은 아직도 살아서 엉금엉금 도로 쪽으로 기어간다. 언제 차에 치일지 모르니 빨리 비각을 세우고 경주박물관에 있는 문무왕비 비편의 모조품이라도 만들어 거북 등에 끼우면 좋을 것이다.
불쌍한 절터. 절 앞뒤를 울산행 도로와 동해남부선 철로가 토막 내 놓았으니 사람으로 치면 머리 잘리고 다리 잘린 불구자다. 이 절은 679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한숨 돌릴 때 난데없이 당나라가 쳐들어와 문무왕이 명랑법사를 불러와 절을 급조하고 그로 하여금 문두루비법을 쓰게 하여 당나라 군대를 바다에 쓸어 넣었다는 절이다.
지금은 차 소리로 시끄러운 절터지만 경덕왕 때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고요한 곳이었다. 그때 월명사라는 시인 스님이 이 절에 계셨고 달 밝은 밤에 그가 피리를 불면 달도 가던 걸음을 멈추었다고 한다. 달 밝은 월명리의 피리 소리, 그 피리로 분 노래가 그의 '제망매가'가 아니었을까.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에 저에 떨어질 잎처럼" 누이와는 한 가지에 났지만 아무도 가는 곳 모르는 게 인생이라고 읊었다.
낭산 남쪽에 '제망매가' 시비를 세우고 거기가 그 향가의 본적지임을 알리자. 피리 부는 월명사와 조요한 달빛을 조각할 수 있으면 더 좋으리라. 또 사천왕사의 건물 일부라도 복원하여 녹유사천왕상전을 전시하고 양지 스님과 명랑법사의 진영이라도 모시자. 그 절의 내력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 더 좋은 역사 교육장이 될 것이다.
너그러운 산 낭산에 오른다. 선덕여왕릉에 이르는 길을 잘 다듬어 덕만길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천 년 솔바람 속에 여왕이 다가설 것이다. 왕릉은 거대한 알처럼 홀연히 나타나 경이롭고 신비롭다. 여왕은 황룡사구층탑에 올라 거기서 바라본 낭산이 수미산이고 그 하늘이 바로 도리천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누워서도 서라벌 대부분과 심지어 부왕의 능까지 굽어보니 호쾌한 여걸이 아닌가.
낭산 입구에서 좌우 산기슭으로 숲길을 내되, 오른쪽 길은 백결길이라고 부르고 그 길가에 터를 잡아 백결선생의 가난한 초옥을 재현하자. 토우장식장경호의 토우처럼 신라금(新羅琴)을 타는 백결선생과 그의 가난한 아내도 만들자. 그의 음악이 낭산 솔밭'대밭을 쿵더쿵쿵더쿵 춤추게 만들 것이다. 왼쪽 솔밭 길은 고운길이라고 하고 능지탑과 중생사를 거쳐 최치원독서당으로 가게 하자. 능지탑에서 동쪽으로 넘는 고갯길은 법민길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 길을 법민길이라고 한 것은 지금의 능지탑 자리에서 문무왕을 화장했기 때문이다. 능지탑 옆에는 그가 죽기 전에 남긴 유조(遺詔)를 비(碑)에 새기자. 어느 제왕이 그처럼 백성들에 대한 절절한 회한과 측은지심을 가졌을까, 가슴 찡한 희대의 명문이 아닌가.
중생사 낭산마애불은 모자를 쓰고 졸고 계신다. 거기서 최치원독서당까지 소나무 숲길을 내면 일품일 것이다. 독서당에도 고운선생의 시비를 세우고 방안에는 '계원필경' 같은 그의 저서를 비치하고 그의 초상이나 필체로 멋진 병풍을 만들 일이다. 낭산 북단을 돌면 황복사 삼층석탑이 나온다. 이 삼층석탑이 국보요, 거기서 나온 금제여래좌상'입상이 다 국보이니 국보 3관왕인 셈이다. 그러나 귀부와 십이지신상 등이 아직 밭두렁과 논바닥에 박혀 있어 딱하기만 하다.
낭산은 이처럼 양지 같은 조각가, 월명사 같은 시인, 백결선생 같은 음악가, 최치원 같은 문장가, 의상법사'명랑법사 같은 고승들이 모이던 신라 최대의 예술인촌이면서 신라 정신의 요람이다. 그러나 그들을 찾아볼 오솔길 하나 없다. 낭산 공원은 왕궁 복원이나 황룡사구층목탑 복원보다 더 국민 친화적이고, 제대로 만들기만 하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명품이 될 것이다.
박재열/시인·경북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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