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급식을 경험하지 못한 중장년층이라면 누구나 도시락에 얽힌 추억이 하나쯤 있다. 석탄 난로 위에 차곡차곡 쌓였던 양은 도시락의 순서, 수업시간 선생님 몰래 함께 까먹던 단짝 친구, 설렘 속에 열어봐도 늘 멸치볶음'콩자반'김치만 들어 있던 반찬통, 친구가 가져온 분홍색 소시지 부침개로 인한 '마음의 상처'까지… . 도시락이란 단어에는 분명 아련한 기억을 다시 끄집어내는 마력이 있다.
하지만 도시락은 더 이상 7080세대의 상징에 머무르지 않는다. 건강과 절약,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으려는 신세대 직장인들이 늘면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새해에도 점심 메뉴 결정이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면 이번 주말에는 예쁜 도시락통을 장만하자. 느낌 아니까~.
◆가난해서? 왕따라서 도시락 싸온다?
(재)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 소프트웨어융합사업부에 근무하는 김남국(42) 씨는 매일 도시락을 두 개씩 챙겨 출근한다. 벌써 6년째다. 밤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잦기도 하지만 건강을 챙길 수 있는데다 식사 비용도 아낄 수 있어서다.
김 씨의 아내가 챙겨주는 도시락은 현미밥이다. 물론 반찬에는 화학조미료(MSG)가 들어 있지 않다. 남는 점심 시간에 산책을 하거나 부족한 잠을 보충할 수 있는 여유는 덤이다. 어쩌다 갑자기 점심 약속이 생기면 동료에게 '선물'해 칭찬도 듣는다. 그는 "구내식당도 저렴한 편이지만 아내의 정성이 가득 담긴 도시락과는 비교가 안 된다"며 "도시락을 갖고 오는 옆 부서 동료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 소개했다.
김 씨 같은 도시락족(族) 직장인들이 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장점이 많기 때문이다. 출판인쇄업체인 대구 M사의 직원들은 지난해 여름부터 하루 평균 네댓 명이 도시락을 갖고 와 점심 식사를 함께 한다. 미혼 여성들이 중심이지만 남성 사원들도 도시락 파티에 종종 동참한다. 음식을 데워먹기 위해 전자레인지도 석 달 전에 구입했다.
이들이 도시락 마니아가 된 이유는 제각각이다. '사먹는 밥이 맛이 없어서' '식당 밥이 소화가 잘 안 되어서'라는 답이 있는가 하면 '음식점에서 먹다 보면 저절로 섭취량이 너무 많아져서' '바깥 음식이 너무 짜서'라는 도시락 예찬론도 등장한다.
도시락을 함께 먹으면서 소통이 확대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이 회사 문창수 과장은 "식사 시간에는 TV 드라마 같은 가벼운 이야기를 주로 나누고 회사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며 "동료 직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를 이해하기 마련"이라고 귀띔했다.
도시락의 사전적 풀이는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든 음식 그릇이나 그 그릇에 담긴 음식'이다. 거창할 리 없다. 몇 가지 반찬과 밥이면 충분하다. 저렴한 한 끼 식사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런치 노마드'가 되기 싫다면, 식당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면, 새해에는 건강해져야겠다는 목표를 세웠다면 간단히 식사 해결 방법만 바꾸면 된다. 단사표음(簞食瓢飮'대나무로 만든 밥그릇에 담은 밥과 표주박에 든 물)은 예로부터 청빈한 선비의 상징이 아니던가.
◆No 벤토(辦堂)! 이제는 '도시의 락(樂)'
'청구영언'(靑丘永言'김천택이 1728년에 엮은 고시조집)에 실린 작자 미상의 한 작품에는 '도슭'이란 옛말이 나온다. '새암을 찾아가서 점심 도슭 부시고 곰방대를 톡톡 떨어 닢담배 퓌여 물고 코노래 조오다가~'라는 대목이다. 도시락의 원형이 도슭이라는 학설의 근거다. '부시다'는 그릇 따위를 씻어 깨끗하게 한다는 뜻이다.
고된 일을 마친 후에 맛있는 도시락을 먹으면 콧노래가 나오기는 옛 농부나 요즘 샐러리맨이나 마찬가지일 터다. 도시락은 이제 '도시의 락(樂)'인 셈이다. 서점가에 도시락 먹는 즐거움에 동참할 것을 권하는 책들이 넘쳐나고, 소외계층에 도시락을 전달하는 봉사활동을 펴는 기업들이 늘어나는 까닭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일부 전통시장들도 도시락을 활용한 마케팅에 발 빠르게 나서 눈길을 끌고 있다. 서울 종로구 통인시장, 경기도 용인 중앙시장 등은 먹거리와 볼거리가 있는 관광명소화를 목표로 '도시락 카페'를 조성'운영하고 있다. 시장을 찾은 고객이 빈 도시락을 들고 시장 내 분식집, 반찬가게, 음식점 등을 돌아다니며 입맛대로 음식을 구입, 시장의 재미있는 먹거리를 마음껏 체험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용인시 관계자는 "장보기 중심의 전통시장을 도시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키자는 아이디어"라며 "시장에 특화된 음식문화공간으로 관광객의 체류 시간을 늘려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도시락통은 키버들의 가지나 대오리 따위로 동글납작하게 만든 작은 고리인 '동고리'였다. '고리'는 음식, 의류, 책 등을 보관하는 바구니를 의미한다. 바느질도구를 넣어두는 반짇고리를 떠올리면 된다. 도시락을 일컫는 북한말 '곽밥'과도 통한다.
요즘 도시락은 이에 비하면 훨씬 세련되고 튼튼해졌다. 내용물도 다양하고 풍성해졌다. 편의점에서 파는 몇천원짜리 저가형들도 있지만 서민들이 쉽게 먹기 힘들 정도로 비싼 '명품'들도 있다. 대구 수성구에 밀집한 대형 일식집들의 경우 최고급 참치 부위, 전복, 횟감 등을 담아 5만원 선에 도시락을 내놓고 있다. 한 일식집 관계자는 "재료비가 많이 들어 마진은 별로 없어도 고객 서비스 차원에서 주문을 받아 도시락을 전달하고 있다"며 "기업체의 중역 회의, 대학 세미나 등이 주요 수요처이지만 남편 직장, 자녀 학교에 보내는 주부들도 꽤 있다"고 귀띔했다.
◆폭풍 성장세 언제까지 이어질까
아내 또는 연인, 어머니의 사랑 가득 담긴 도시락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전문업체들의 도시락도 인기가 뜨겁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도시락 시장은 급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 몇 년 새 시장 규모가 해마다 40% 이상 늘어나 2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 가운데 전자레인지 등에 데워 먹는 편의점 도시락이 7천억원, 직접 조리해서 판매하는 도시락 전문점'중소 외식업체 도시락이 1조3천억원을 차지한다. 최근에는 일본 업체도 국내에 진출하고 있다.
대구가톨릭대 임현철 외식식품산업학부 교수는 이와 관련,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여전히 도시락 전문점을 유망 창업 아이템으로 꼽을 수 있다"며 "소자본으로 창업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예비창업자가 몰리고 있지만 저렴한 가격에 품질까지 갖춰야 고객 만족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도시락 산업의 팽창 이유로는 경기 침체의 장기화에 따른 알뜰 소비족의 증가와 함께 1인 가구의 증가가 꼽힌다.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 1인 가구 수는 454만 가구로 전체 가구 수의 25.3%를 차지했다. 2035년에는 34.3%로 더욱 증가할 전망이다. 1인 가구의 식사 준비 비용은 대가족의 1인당 비용에 비해 높을 수밖에 없어 저렴한 도시락을 사 먹는 수요가 늘어날 것이란 분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도시락 천국'으로 불리는 일본의 경우 도시락 시장은 커진 반면 외식시장 규모는 축소됐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소득수준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새로운 틈새시장의 타깃이 되고 있다. 대구백화점은 지난해 3월 '밥고리'란 자체 브랜드의 도시락 제품을 선보였다. 가격은 8천~1만3천원대로 저렴한 편이 아니지만 입소문을 타고 주문이 꾸준히 늘고 있다. 대구백화점 손현진 주임은 "한식'중식 등 15종류를 판매하고 있는데 체중 조절과 몸매 관리에 힘쓰는 여성들 사이에서는 샐러드팩 도시락이 인기"라며 "퇴근하는 길에 저녁 도시락을 사가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국내 한 도시락 전문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야식을 포함한 저녁 식사용으로 도시락을 구입한 사람은 전체의 10% 정도나 됐다. 직장이나 학교에서의 점심 해결용이던 도시락이 이제는 저녁상에도 오르는 세상이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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