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선 통 볼 수 없지만 우리 동네에 하나 있는 것이 연기이다. 우리 동네 겨울 아침녘에는 연기가 피어 오른다. 집집마다 보일러가 있지만 산에 나무해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핀다. 연기는 아름답게 동네에 퍼진다. 연기가 아름다운 것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저렇게 아름답게 우리도 자유롭게 피어날 수 없을까?
머지 않은 옛날에 외할머니가 종종 나에게 아침에 마을 어귀에 나가, 어느 집에 연기가 안 나는지 살피라고 한 적이 있다. 아침에 연기가 안 나는 집은 혹시 끼니가 없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연기처럼 아름다운 할머니의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람은 사랑할 때 자유롭고, 자유로울 때 사랑이 연기처럼 피어난다.
난 중학교 3학년 때, 천주교로 입교했다. 그때, 영세를 주신 그 신부님은 만나기만 하면 늘 '넌 어디로 튈지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농담으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 '발산 창의력'이라고 대답한다. 요즈음 태어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그렇게 되었다면 영락없이 'ADHD'(주의력 결핍 과잉행동 장애)라는 꼬리표를 주홍글씨처럼 달고 다녔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 후배 신부는 이런 나를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라고 말하지만, 그 자유는 제도권하고 맞지 않을 뿐더러 나대고 위험하다는 말로 들린다.
나대고 설치고 자기 멋대로 하는 아이들에게 주는 약이 있다고 한다. 이른바 'ADHD' 징후군이 있는 아이들에게 각성제를 먹이면 고분고분해진다. 참으로 무서운 약물이다. 자유로운 아이를 자유로부터 도피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자신이 말을 할 때, 주위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자기 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진정 우리 사회는 자유롭지 못하다. 말을 하고 싶어도 말 못하고, 가고 싶어도 찍힐까봐 가지 못한다. 약간만 다른 말을 해도 틀렸다고 하니까,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지 않는가!
최근에는 여기저기에서 '너도 종북신부인가'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때마다, 나는 '종북신부'가 아니고 '경북 신부'라고 웃겨버리고 만다.
독일에서 아주 유명한 대안학교 '발도로프슐레'는 나치 독재자 히틀러 치하에서 학교 문을 닫은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 학교의 철학은 자유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자유가 없는 획일화 속에 우리가 흔히 창조경제, 창의성, 통합, 융합, 통섭이라고 말들 하지만 무엇이 제대로 솟아나겠는가?
연기는 어느 곳이라도 잘 스며드는 것은 자유롭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에서는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3장 8절)고 했다. 역대 교황님의 많은 담화와 회칙을 읽었지만,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명랑하고 소박하고 '콕콕' 찌르는 글은 읽지 못했다. 그분은 연기처럼 참으로 자유로운 분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자유는 단순한 자유가 아니다. 대중의 인기를 의식한 쇼적인 행동과 차원이 다르다. 그의 자유에는 그리스도를 향하는 깊은 영적 지향이 있다. 그런 지향 앞에서 천주교의 딱딱한 격식과 절차가 종종 치워질 뿐이다. 지난해 성탄 자정미사 때도 그는 아기 예수상을 두 손으로 직접 들고 걸었다. 관례상 수행하는 이가 아기 예수상을 든 채 뒤에서 따르고 교황은 몇발 앞서 걷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그런 전례를 아무렇지도 않게 깨버렸다. 대중의 눈에는 대단히 자유로워 보였다. 그럼에도 어지럽지 않았다. 그에게는 분명한 지향이 있기 때문이다.
(사)'커뮤니티와 경제' 이사장 정홍규 신부 comomont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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