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또 하나의 아들, 타이거 박

사위는 백년손님이라, 딸의 평안을 위해서는 늘 어려운 손님처럼 깍듯이 대해야 한다고 했거늘, 지난해 늦가을부터 자네 집에 눌러앉아 해를 넘겨서야 떠나는 이 배짱 좋은 장인이 자네 앞으로 몇 자 적네.

챙기다 보니 가져갈 짐이 올 때보다 훨씬 많아져 버렸네. 김치, 된장, 고추장, 마른반찬 등을 담아왔던 가방이, 여행지의 낯선 풍경만 담아도 가득 차네. 라스베이거스의 흥청거리던 거리, 레드락캐년의 인디언 유적지, 상상 너머의 세상 디즈니랜드, 맨해튼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아침마다 집 창문 너머로 손을 내밀던 원시림의 큰 나무들, 차로 10분만 달려가면 뉴욕 시가지 끝을 끌고 와 발아래 출렁대던 바다, 그 아름다운 해변 길도 접어 넣었네. 그중에서도 가방 가장 깊숙이 넣어가는 것은, 밤마다 손자 손녀와 함께 책을 읽고, 숨바꼭질할 때 녀석들의 웃음소리지. 그리고 자네의 따뜻한 마음이네.

자네가 우리 집 식구가 된 지도 벌써 15, 6년 되었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딸아이가 처음 자네를 대동하고 대구의 아파트에 나타났을 때, 사실 나는 자네가 꿇어앉아 뭐라 뭐라 더듬거리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내 곁이 아니라 산적 같은 자네 곁에 나란히 앉은 딸아이와의 거리가 천리만리나 되는 듯해 참 섭섭했었지. 그때 자네는 캐나다에서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모국 체험을 위해 서울의 한국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었지. 초등학교 5학년 때 가족을 따라 캐나다에 이민을 갔었고.

이듬해 광복절날 결혼식을 올리고 9월에 자네가 딸아이를 데리고 캐나다로 떠나가고 나서, 우리 부부는 얼마나 허전했는지 모른다네. 그 무렵, 내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일은,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진 딸의 안부가 궁금해서 국제전화를 연결하면, 자네와 티격태격하기라도 했는지 착 가라앉은 딸아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올 때였지. 그럴 때마다 나는 운동화 끈을 졸라매고 집을 나서서 태평양 파도 위를 밤새도록 걷고 또 걸어 밴쿠버 자네 집으로 가고 있었네. 가도 가도 닿을 수 없어 아득하고 어지럽던 그 파돗길을.

그래도 나는 자네들을 믿으며 나보다 더 안달하는 집사람을 달랬네. 3천 년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 한 번 스친다는데 부부의 연은 어디 보통이겠는가, 하늘에서 실이 한 올 떨어지다가 땅에 꽂혀 있던 바늘의 귓속으로 쏙 들어가는 정도의 인연이어야 부부가 된다고 했는데 자네들을 부부로 맺게 한 뜻이 있겠지, 하며 말일세.

기대대로 자네들은 금방 손을 잡고 씩씩하게 행군해 갔었지. 캐나다 생활을 접고, 새로운 꿈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자네들의 빛나는 젊은 시절은 시작되었지. 자네는 코넬대 MBA 공부를, 또 딸애는 로스쿨 공부를 하면서 말일세. 그래, 젊은 시절에 매달려 볼 만한 것으로 공부만 한 게 또 어디 있나, 하면서 마음속으로 응원 많이 했다네. 그런데 지금도 내가 고개를 못들 만큼 부끄러운 것은,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공부가 끝날 무렵인 이듬해 겨울에는 햄버거 하나를 사서 둘이 나눠 먹어야 할 만큼 궁핍했던 모양인데 나는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고 용기를 준답시고 시시껄렁한 시나 적어 보내곤 했으니.

졸업 후 뉴욕 월가에 직장을 구하면서 그 후 십여 년간 자네들이 이룬 성취는 정말 눈부셨네. 운동화 밑창이 다 닳도록 발품 팔아 구했다던 그 플러싱가의 작은 월세 아파트를 그리니치 숲 속의 저택으로 바꾸어 놓았으니. 그런데 내가 눈물 나도록 기쁜 것은, 경제적 성취도 성취지만 자네 부부가 서로 바라보는 시선이 갈수록 그윽해진다는 것이네. 수천 겁의 무량한 세월 이전부터 딸애 곁에 있는 듯한 자네가 자꾸만 아들 같다는 생각이 드네. 좋은 사위를 얻어 아들 하나를 덤으로 얻었으니 내가 횡재를 한 셈이지. 고맙네.

자기 일을 좋아하고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 그 딱딱한 펀드 일을 창작이며 예술이라고 우기는, 세상에 둘도 없는 고집쟁이. 그 강철 같은 고집 하나로 하루 25시간을 살며 자신만의 성채를 쌓아가는 슈퍼 에너자이저. 늘 꿈을 꾸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로맨티시스트, 타이거 박(Tiger Park), 나는 언제나 자네 편일세. 잘 있게.

김동국/시인 poetkim1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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