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한국무용, 그것도 '대구흥춤'이라는 한 길을 걸어온 백년욱(69) 씨. 그는 평생을 스승이자 대구 무용계에 큰 족적을 남긴 정소산 선생의 뜻을 이어받는 데만 매진했다. 11살 때부터 시작한 60년 외길 인생이다. 50년 가까이 백년욱무용학원을 운영해오고 있는 백 씨는 5살 때 처음 무용을 접했다. 당시 일본에서 유학했던 아버지가 최승희의 춤을 보고 맏딸인 백 씨를 데리고 무용학원을 찾은 게 시작이었다. 백 씨는 "당시 인교동 금호호텔 뒤편에 있던 김상규 선생의 무용연구소를 찾았는데, 유치원생이던 나를 보고 현대무용이나 발레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고전 무용을 가르치셨다"고 했다.
시작은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서였지만, 본격적으로 무용인의 길을 걸은 것은 순전히 그녀의 의지였다. 백 씨는 11살이 되던 해, 제대로 한국무용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정소산 선생의 고전무용학원을 찾아갔다. 마지막 궁중무인으로 궁에서 나온 뒤 권번에서 기생들에게 춤을 가르쳤던 정소산 선생이었다. 선생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자신이 태어난 대구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했다.
"당시엔 체계화된 교습법 같은 건 없었어요. 흥에 겨운 스승님이 목에 늘 감고 계시던 수건을 풀어 들고, 지금은 대금 명인이 된 이생강 씨에게 반주를 하도록 한 뒤 대청마루에서 춤사위를 선보이면, 그 모습을 그대로 따라하며 배웠지요."
스승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백 씨는 스승이 남긴 최고의 작품인 '대구흥춤'을 온전히 보존하고 가치를 알리는 일에 매달렸다. 매년 정기공연이 있을 때마다 대구흥춤을 무대에 올린 것이 벌써 35회째다. 대구흥춤은 즉흥무라고도 하고, 수건춤으로 불리며 살풀이와 비슷한 춤사위를 보이지만 그와는 확연히 다른 매력이 있다는 것이 백 씨의 이야기다.
"즉흥무라고 해서 즉흥적으로 춤사위를 이어간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즉흥무는 인간이 즉흥적으로 느끼는 순간순간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담아낸, 슬픈 듯 기쁨이 묻어나고 기쁨 속에서도 아릿한 슬픔이 배어 나오는 춤사위이기 때문일 겁니다."
백 씨는 선생이 남긴 그대로의 춤을 온전히 이어가고 있다. 하지만 춤이 너무 길면 관객들의 집중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생각에 12분에 이르던 것을 최근 8분짜리로 완전하게 다듬었다.
정기발표회에서는 그만의 창작무를 선보이기도 하는데 그때는 자연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백 씨는 "아름다운 춤이라는 것은 무용인의 내면세계부터 정화돼 몸짓으로 승화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그래서 늘 제자들에게 먼저 올바른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한다"고 했다.
백 씨의 온 집안이 무용인이다. 최아리다와 화진, 석민 등 그의 세 자녀를 비롯해 여동생, 조카들까지 모두 13명이 무용인이다. 예인의 피가 흘렀는지 자연스레 무용을 택했다고 한다. 한 여동생은 무용 의상만을 전문적으로 제작하고 있다.
그녀는 "현재 온 집안이 대구흥춤을 익혔고, 이를 이어가는 데 마음을 쏟고 있다"며 "정소산 선생의 유일한 제자이고 혼자 춤을 추다 보니 그분의 위대한 업적을 알릴 길이 많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는데, 자식과 조카들까지 이 길에 함께해줘 정말 든든한 마음"이라고 했다.
백 씨는 "이제 남은 소망이 있다면 지역에서 정소산 선생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아 그분이 남기신 '대구흥춤'이 후세에 길이길이 이어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라며 "그래야 언젠가 내가 세상을 떠나는 날, 하늘에서 스승님을 뵙고 최선을 다했노라고 인사를 드릴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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