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 칼럼] 박근혜 대통령님께

저는 지난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원칙을 지키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할지, 아니면 친근감이 가는 문재인 후보를 지지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문 후보의 다양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구경북의 경제 발전, 인재 등용에 대한 기대와 함께 기초단체장 정당공천 폐지를 공약한 박 후보를 선택했습니다. 문재인 후보도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를 공약했지만 실현 가능성과 파괴력에서 새누리당이 훨씬 낫고 진정성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박 후보가 바로 신뢰의 주인공이었으니까요.

저는 대통령님이 후보 시절 기초단체장 정당공천제 폐지에 대한 공약을 발표했을 때를 잊지 못합니다.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낼 수 있는 분'이라고 내심 감격해하면서 신문 지면 제작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입장에서 그날 주저 없이 이를 1면 톱기사로 실었습니다. 혹자는 국회의원들이 100여 가지 특권을 모두 내려놓더라도 이것만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저는 그 누가 아닌 '박근혜'의 입으로 발표되는 공약이었기에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명박정부 초기에 '세종시로 국가 기능을 옮기는 것이 도저히 불가하다'는 청와대에 맞서 약속은 지켜야 한다며 이를 관철시킨 분이 바로 대통령님이었기에 저는 '된다'에 방점을 찍었지요. 세종시가 어떤 곳입니까. 노무현정부가 수도를 이전하겠다고 나섰다가 위헌 결정을 받고 청와대와 국회는 둔 채 총리실과 정부 경제 부처를 옮겨간 곳 아닙니까. 위헌 논란을 비켜간 것이지만 당시 한나라당의 절대 강자였던 대통령님은 청와대와 정부를 무력화시키면서 원칙을 고수해 국민들로부터 역시 원칙주의자라는 인정을 받았고, 이 점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그리고 108만여 표 차이로 대통령이 됐습니다.

대통령 후보가 수많은 법률 전문가 집단에 자문해 공약을 발표했고, 집권 이후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가 수차례 폐지를 확인했으며, 야당은 당론으로 이를 확정 지어 국민들은 성사되는 것처럼 인식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여론조사에서도 기초단체장 정당공천 폐지는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누리당 의원들은 이 얘기만 나오면 한결같이 위헌을 말합니다. 위헌임을 알고도 집권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는 건지, 집권 이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시간 끌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정도가 아닙니다. 설사 위헌 소지가 있다면 세종시처럼 보완 장치를 마련하면 될 것입니다. 또 헌법학자들 사이에선 새누리당이 당시 위헌 판결 내용을 사실과 다르게 침소봉대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 설사 위헌이라고 해도 국민의 절대다수가 찬성하는 것이라면 헌재의 판단도 다를 수 있지 않을까요?

얼마 전 청와대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더군요. 식사에 초청된 한 당직자가 기초단체장 공천 폐지에 대해 대통령께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난감하다는 말을 꺼내자 옆에 있던 김기춘 비서실장이 "당에서 알아서 할 일"이라며 선을 그었답디다. 이게 사실이라면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진에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 공약을 누가 발표했습니까. 당에서 슬그머니 끼워넣은 것이 아니라 후보가 직접 대국민 성명 형식으로 내걸었습니다. 그걸 왜 당에서 알아서 합니까. 대통령과 참모들이 해야지요. 필요 없고 귀찮은 것만 당에 맡긴다면 여당은 쓰레기 처리장으로 오인받게 됩니다.

이 공약을 폐기하게 되면 대통령 임기 내내 오로지 집권을 위해 지키지 못할 공약, 그것도 위헌인 공약을 알고도 내걸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했던 '원칙에 대한 신념'은 한순간에 날아가 버립니다. 권위가 추락하고 레임덕이 생기는 것은 불문가지이지요. 반면 국회의원들은 엄청난 권한을 그대로 보유하니 쾌재를 부를 것입니다. 국회의원 권한 살려 주려고 대통령이 희생양이 됩니다. 공천제를 유지한다고 여당의 기대대로 야당이 다수인 수도권 단체장 확보가 가능할까요. 오히려 정권 심판론에 힘을 실어주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님이 야당 대표의 입장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하실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아마 광화문 광장에 천막 깔아놓고 청와대를 향해 원칙을 지키라는 농성을 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국회의원들의 이권을 챙기겠습니까! 국민의 바람을 실천하시겠습니까!

최정암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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