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희의 동양고전 이야기] 충직한 신하 '소무' 빗댄 이릉은 누구?

'한서'(漢書) 속 이릉(李陵) 이야기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은 비운의 장수 이릉을 변호하다 궁형이라는 형벌을 받고 고통과 울분 속에서 명저를 남겼다. 그 이릉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한서'에는 훌륭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다. 이릉이 처했던 시대와 당시 상황이 여의치 않았던 것을 사마천은 고려하여 옹호하였던 것 같다. '한서'에서는 이릉과 충직한 신하 소무(蘇武)를 비교하여 기술해 놓았다.

한 나라의 사절로서 흉노 땅에 들어간 소무는 부하가 그곳 궁정 음모에 휘말리는 바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흉노의 왕은 소무를 바이칼호(북해) 부근으로 귀양을 보내었다. 한편 5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흉노 땅에 들어간 이릉은 몇 배나 많은 흉노 군대와 싸워 선전했으나 그만 사로잡히고 말았다. 한 무제는 이릉의 참패를 이유로 일족(一族)을 죽여 버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이릉은 흉노에 귀순하여 높은 벼슬까지 얻었다. 흉노 왕은 이릉을 바이칼호에 가 있는 소무를 만나보고 오라고 보내었다.

소무와 이릉은 한 나라에 있을 때 함께 궁중 관리를 지낸 사이였다. 소무가 흉노 땅에 사절로 온 다음 해에 이릉은 흉노에게 항복하였으므로 소무를 찾아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다시 흉노 왕은 이릉을 바이칼호로 보내 소무를 위해 연회를 베풀었다. 그때 이릉은 소무에게 "흉노 왕이 그대를 설득하라고 나를 보냈소. 그대가 마음만 돌이킨다면 아무 선입견 없이 받아들일 것이오. 한 나라에 있는 그대 형과 아우는 관리로서 작은 실수 때문에 자결하였고, 부인은 재혼했다고 하오. 그 외 누이와 따님, 아들들은 생사조차 모른다오. 사람 목숨은 아침 이슬과도 같은 것, 이곳에서 이렇게 고생만 할 것이 무어 있겠소"라고 하자, 소무는 "우리 부자는 아무런 공도 없는데, 폐하의 은덕으로 장수의 대열에 올랐으니, 충성을 다하고 싶소"라고 하였다. 한 무제가 죽고 소제(昭帝)가 즉위하였다. 한 나라는 흉노와 화친조약을 체결하고 소무를 돌려보내 달라고 흉노에 요청하였다.

이때 이릉은 말하기를 "이제 그대는 돌아갈 것이오. 나의 경우 그때 폐하(한 무제)가 어머니를 죽이지 않고, 내 죄를 용서하여 설욕할 기회를 주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일가가 몰살된 마당에 내가 무슨 여한이 있었겠소. 그대 내 마음을 이해해 주시오. 우린 서로 다른 나라 사람이 되고 말았구려. 다시 만날 수 없을 테지요?"라고 하며 두 사람은 헤어졌다. 흉노 왕은 소무와 함께 온 사람들을 보내주려고 찾아 모으니, 항복했거나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많아 겨우 9명밖에 없었다. (李廣蘇建傳) 사마천은 이릉의 불행한 처지를 이해했던 모양이다.

이동희 계명대학교 윤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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