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진정 사랑하면 그 사람을 닮게 된다. 가수 채환(본명 이헌승'36)의 삶과 노래에는 김광석이 구석구석 스며 있다. 심지어 목소리까지 닮았다. 어린 시절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김광석의 목소리는 외로웠던 열두 살 소년을 따뜻하게 감쌌고, 그날의 감동이 채환을 가수의 길로 이끌었다. 그의 인생에서 김광석은 어떤 의미일까. 김광석의 50번째 생일이었던 이달 22일, 대구 방천시장 '김광석 거리'에서 가수 채환을 만났다.
◆웃는 모습도 닮았네
"그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그대를 바라볼 수 있는 것만으로~".
22일 오후 대구 중구 대봉동 방천시장 김광석 거리. 활짝 웃고 있는 김광석 동상 앞에 가수 채환이 기타를 들고 섰다. 그가 부른 노래는 김광석의 '그날들'. 눈을 감고 들으니 누가 진짜 김광석인지 헷갈렸다. 눈가 주름마저 김광석 동상과 닮았다. 이날 그는 김광석 거리의 유명 인사였다. 22일, 김광석의 생일에 맞춰 '김광석 탄생 50주년 거리 콘서트'에 채환이 초대됐기 때문이다. 알아본 몇몇 시민들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다가와 인기를 실감케 했다.
채환이 유명세를 탄 것은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인 '히든싱어' 김광석 모창 본선에 진출하면서부터다. 그는 그르렁거리는 듯한 김광석 특유의 창법까지 그대로 따라해 모두를 감쪽같이 속였다. 또 그가 방송에서 김광석 거리를 언급한 뒤로 방문객들의 발길이 이곳으로 이어져 '채환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채환이 가수가 된 것은 순전히 김광석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경북 청도에서 여동생과 같이 대구로 유학 왔어요. 평생 농사를 지으신 부모님이 자식들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대도시로 보낸 거죠. 그때 빨간 라디오 하나 들고 대구로 왔는데 우연히 광석이 형 노래를 들었어요."
그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광야에서'라는 곡이었다. 12세 소년이 이해하기 어려운 노랫말이었지만 가장 외로웠던 순간에 들었던 김광석의 목소리는 외로움을 잊게 했다. 채환은 "도시 학교에서 '촌놈'이라고 따돌림당하고, 텅 빈 집에 들어왔을 때 나를 위로해 준 것은 광석이 형 노래였다. CD와 MP3가 없었던 그 시절에는 라디오에 형 노래가 나올 때마다 빨간색 버튼을 눌러 녹음했다. 그렇게 120분짜리 김광석 앨범을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자살 막자! 희망 전하는 가수
채환은 김광석을 실제로 딱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대구에서, 한 번은 서울에서 만났다. 강산애와 장필순, 한동준이 대구에 공연을 왔을 때 무작정 찾아갔었고, 서울의 한 소극장에서 콘서트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밤기차를 타고 날아갔다. 공연 쫑파티에 스태프를 가장해서 잠입(?)할 정도로 열정 가득한 팬이었다. "그때 공연 쫑파티에서 형한테 물었어요. 어떻게 하면 노래를 잘할 수 있냐고요. 2시간 뒤 형이 어깨를 툭 치며 이야기했어요. 멀리서 나 보러 온 열정으로 노래해라. 가슴으로, 마음으로 노래하라고요." 그날 김광석과 나눈 대화는 채환의 음악 인생 방향이 됐다.
하지만 김광석의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 그의 삶도 흔들렸다. 1996년 1월 6일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이유다. 채환은 "그때 형한테 정말 실망했다. 더 이상 음악을 안 하겠다는 생각으로 갖고 있던 음반과 추억을 모두 버렸다"고 했다. 그에게는 김광석만큼 따르는 친한 형 A가 있었다. 대구에서 기타와 노래를 가르쳐줬던 A와 채환은 오랫동안 함께 살았다. "광석이 형이 죽은 뒤 그 형도 계속 '죽고 싶다'는 말을 반복했어요. 그리고 자살 시도도 한 번 했었죠." 그 사건 이후 채환은 월세 15만원짜리 여관방으로 옮겼다. 아끼는 사람을 또 잃게 될까 봐 두려웠지만 두려움은 곧 현실이 됐다. A도 김광석처럼 목을 매 자살했다.
사랑하는 사람 두 명이 세상을 떠난 뒤 채환은 다시 노래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희망을 주는 뮤지션'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세웠다. 그는 '희망을 파는 콘서트'(이하 희파콘서트)라는 이름으로 전국을 찾아다니며 노래했다. 전교생이 80명도 안 되는 산골 중학교, 호스피스 병동 등 노래가 필요한 곳을 스스로 찾아다녔다.
제1회 희파콘서트가 열린 곳은 대구 동성로 대구백화점 앞이었다. 물론, 전부 김광석의 노래를 불렀다. 그의 뜻을 알아본 사람들은 '거리의 천사'라고 이름 붙였고, 십시일반 후원도 했다. 희망을 담은 첫 앨범 '파이팅'은 1천원, 2천원씩 시민 후원으로 500만원을 모아 만들었기에 더 의미가 있었다. 지금도 40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정기 후원을 하고 있어 희파콘서트를 이어가는 힘이 된다.
◆희파콘서트 1천 회가 목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콘서트는 뭘까. 채환은 망설임 없이 '청송 약수터 콘서트'를 꼽았다. "달기약수터라고 물이 좋다고 유명한 곳"이었다며 껄껄 웃었다. 어르신들 앞에서 김광석 노래를 부르는데 한 할아버지가 채환에게 다가왔다. "혹시 자네 김광석 아닌가? 우리 아들이 당신 노래 많이 듣던데." 김광석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할아버지는 채환에게 노래를 신청했다. "할아버지가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셨어요. 얼마 전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고요. 이 소식을 듣고 할아버지 아들까지 약수터로 달려오셨죠." 그는 "김광석 노래에는 시대와 세월을 거스르는 힘이 있다는 걸 느꼈다"고 말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지난해 한국자살예방교육협회 홍보대사로 위촉됐다.
갑자기 좋은 일만 하고 다니는 그의 생계가 걱정됐다. 채환은 "앨범을 많이 내서 음원 저작권 수입이 꽤 된다. 욕심 없으면 충분히 살 수 있을 정도"라며 걱정하는 기자를 안심시켰다.
채환은 앨범을 34장이나 발매한 '중견 가수'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김광석이 없는 '가수 채환'이 가능한지 궁금해졌다. 뮤지션이라면 자기만의 음악 색깔과 정체성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을 것 같았다. "사실 광석이 형을 버리려고 많이 노력했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음반을 냈고, 트로트와 재즈, 메탈 등 다양한 장르를 시도했어요. 형 스타일이 아니라 내 것을 찾으려고 했던 거죠." 하지만 '채환의 색깔'은 결국 김광석으로 귀결됐다. 채환은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형의 노래라는 것을 깨달았고, 다시 '포크'로 돌아왔다"고 웃었다.
채환은 인터뷰 내내 김광석을 '형'이라고 불렀다. 도대체 김광석이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형은 제 삶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요. 내가 가는 길마다 밟히고, 마주치고, 내 인생의 시작이자 끝이죠." 그래서 걱정도 많다. 요즘 김광석이 대중과 언론에 많이 회자되면서 상업적으로 잘못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돼서다. 채환은 "내가 거리 공연을 계속하는 것은 대중과 직접 호흡하기 원했던 형의 뜻을 이어가고 싶어서다. 형을 진짜 사랑하고, 추모하는 마음으로 방송과 뮤지컬 등 모든 일이 시작됐으면 한다"고 바랐다.
채환의 마지막 앨범 타이틀은 '마흔 즈음에'다. "다음 세상에서는 형과 함께 노래하고 싶다"는 가사가 그의 심정을 대변한다. 이날 김광석 거리에서 한 공연은 제955회 희파콘서트가 됐다. 채환은 "마흔 즈음에 앨범으로 희파콘서트 1천 회를 달성하는 것이 내 목표"라며 "형의 감성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가슴으로 노래하는 가수가 되는 것은 내 평생의 목표"라고 말했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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