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민송기의 우리말 이야기] 약속

러시아의 교육학자인 비고츠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이 숫자를 세면서 손가락을 꼽는 것이라고 했다. 전기나 증기기관, 반도체 같은 위대한 발명품들이 많은데 왜 하필 그것을 가장 위대하다고 했을까? 비고츠키의 설명은 이렇다. 숫자를 세면서 손가락을 꼽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억을 보조해 줄 장치의 필요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억의 보조 장치에 눈을 뜬 인간은 손가락 외에 여러 기호를 만들어 사용하였는데, 그 기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문자이다. 인간은 문자를 통해 지식을 축적함으로써 다른 동물과 달리 엄청난 진보를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설명을 들으면 매우 그럴듯한데, 그 이유는 비고츠키가 문자 언어의 핵심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재미있게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비고츠키가 말한 것보다 더 위대한 발명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그것은 바로 '약속'이라는 것이다. 약속이라는 것은 문자가 생기기 전에도 인간 사이에서 존재했다. 만약 쌀을 지어 만든 음식을 어떤 사람은 '밥'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술'이라고 한다면 두 사람 사이에 의사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다. 그 음식을 '밥'이라고 불러야 할 이유는 없지만 '밥'이라고 하자는 약속을 함으로써 두 사람은 원활하게 서로 생각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언어의 사회성'이다.) 말에서 이루어진 이 약속은 법률, 제도 등으로 확장되면서 인간 사회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약속을 통해 확장되고, 발전해 간다고 할 수 있다.

'약속'이라는 것이 얼마나 편리하면서도 중요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현대의 경제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5만원 지폐의 원가(실질 가치)는 120원 정도로 500원 동전보다 못하지만, 500원 동전 100개와 교환할 수 있는 것으로 인정을 한다.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이 약속 때문에 사람들은 물건을 사기 위해 금덩어리나 쌀을 들고 다니며 물물교환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은행 전산망에 몇 줄의 데이터로 남아 있는 예금을 실물 자산과 똑같이 취급을 하는 것은 은행과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내가 통장에 10억을 적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10억의 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이유는 남들이 '밥'이라고 말하는 것을 나 혼자 '술'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난주 카드사들의 개인정보 유출로 온 나라가 엄청난 혼란과 불안에 빠졌다. 우리 사회를 뒷받침하고 있던 약속이 깨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금융 기관의 전산망과 정보를 건드리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 근간을 뒤흔드는 매우 중대한 범죄다. 재발을 방지하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약속'을 깨뜨린 이런 범죄는 법정 최고형을 내려야 한다는 약속이 필요하다.

능인고교사 chamtc@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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