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정민아의 세상을 비추는 스크린] 동화 속 공주? 앙칼진 여성시대

여성영화의 분투…겨울왕국·수상한 그녀·피끓는 청춘

실로 오랜만에 여성영화의 분투가 뜨겁다. 최근까지 극장가는 주로 남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흥행의 선두를 차지하고 있었다. '변호인' '친구2' '용의자'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등. 그러나 최근 흥행 선두 영화 리스트들을 보면 여성영화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겨울왕국' '수상한 그녀' '피 끓는 청춘'의 선전을 접하는데, 그간 여배우 주연의 영화 제작이 드물던 현실에서 지금의 이 흐름이 어느 정도는 지속되어 한국영화 제작에 새로운 활력이 되길 기대한다.

디즈니 스튜디오의 완벽한 부활을 알린 '겨울왕국'이 선두에 자리하고 있다. 작품성 면에서도 인정받으며 아카데미상 후보로 올랐다. 영화의 성공에는 음악과 영상이 한 편의 뮤지컬을 보듯 완성도 높게 어우러진 측면이 크지만, 동화적 배경과 구성임에도 시대에 맞게 주인공 캐릭터에 일대 혁신을 꾀하고 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야기는 어린아이들도 이해하기에 무리가 없을 정도로 단순해서 온 가족이 즐기기에 좋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주제의식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왕 부부의 급작스러운 사망 이후 왕국의 여왕으로 등극한 엘사에게는 말 못할 비밀이 있다. 그녀의 손만 닿으면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어 버린다는 것. 엘사의 신비로운 능력을 위험천만한 것으로 여긴 왕국의 권력가들은 엘사를 '괴물'이라고 공격하고, 그녀는 멀리 달아나 얼음 성을 쌓아 스스로 그 안에 갇힌다. 이야기는 이런 엘사를 찾기 위해 동생 안나가 뒤따르면서 겪는 모험담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무엇보다도 영화는 '왕자가 공주를 위험에서 구하고 둘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 동화 판타지를 비튼다. 왕자는 공주를 자신의 왕위 찬탈을 위한 도구로 생각하며, 공주의 목숨을 구할 진실한 사랑을 담은 키스는 생각지 못한 사람으로부터 이루어진다. 핸섬한 왕자와의 사랑을 꿈꾸던 공주의 미성숙함은 거친 여정을 통해 극복되고, 공주는 진정성을 가진 인물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혜안을 갖추며 성숙해간다.

중요한 것은 영화가 담고 있는 진짜 주제인데, 엘사라는 기이한 능력을 가진 돌연변이를 대하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자. 사람들은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고, 비정상은 사회에서 선을 긋고 대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것으로 여기기 일쑤다. 하지만 그녀의 비정상적 능력은 어떤 순간에 사랑스럽게 발휘될 수 있으며, 다른 것은 위험한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아이들에게 균형 잡힌 공정한 시선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는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다. 왕실의 권력 찬탈이라는 복잡한 어른들의 문제가 엘사와 안나의 자매애를 통해 극복되며, 두 공주는 남에게 기대지 않고 시종일관 독립적으로 자신의 문제에 스스로 맞서 해결을 본다. 머나먼 왕국의 동화 이야기지만 힘도 세고 기지도 넘치는 말괄량이 공주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며, 알파걸의 부상을 디즈니가 적극적으로 반영하여 완성해낸 이야기이기에 작품은 호평과 흥행이라는 부상을 받았다.

한국영화 '수상한 그녀'는 '할매'라는 키워드와 함께 심은경의 매력이 영화를 이끄는 주요 요인이고, '피끓는 청춘'의 키워드는 복고와 추억이다.

'수상한 그녀'는 칠십 노인이 스무 살 여인의 몸으로 바뀌면서 겪는 좌충우돌을 통해 가족의 가치를 다시금 확인하는 이야기이다. 지난해 대중문화의 주요 키워드가 '복고'와 '가장'이었고 이 단어들은 올해에도 다양한 변주를 보이며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정치, 사회, 대중문화면에서 노인들의 활약이 돋보였던 최근의 경향에 맞추어 '수상한 그녀'는 노인, 복고, 과거, 추억, 가족이라는 요소들을 가지고 적절히 대중의 눈높이 맞춘 기획오락영화로서의 폭발력을 발휘한다. 국민 어머니의 타이틀을 가진 배우 나문희와 '써니' 등의 전작들에서 개성 있는 연기를 펼치며 가능성을 보인 심은경의 연기가 영화를 관람케 하는 큰 동력으로 작용하지만, 여배우의 열연을 빼고 나면 영화의 큰 줄기는 허망하게 느껴진다. 어려운 시절을 악착같이 살아야 했던 어머니, 약간은 부도덕해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감싸야 한다는 가족이기주의를 은연 중에 표방하고 있으며, 노인이 젊은이의 몸에 빙의하고서도 하고 싶은 게 기껏해야 '연애'라는 로맨스 상술은 얄팍하다. 발랄하고 유쾌하지만 깊이 있는 감동과 반성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는 점에서 아쉬울 수밖에 없는 영화다. 하지만 노인을 위한 영화가 없는 현실에서 할매 할배 신드롬을 이끌 소중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피끓는 청춘'은 '수상한 그녀'보다도 더 퇴행적이다. 1982년 교복 세대의 사랑과 꿈을 이야기로 펼치며 복고적 감수성에 기대어 영화를 보는 잔재미를 주지만, 이때의 복고는 추억 팔이 마케팅용에 불과하다. 영화는 카사노바 남학생 이종석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이종석이 겪는 사건과 해결, 오해, 그리고 사랑의 열쇠를 쥐고 있는 인물이 일진 여학생 박보영이며, 그녀에게도 동등한 카메라 시점이 부여된다. 기존 과거를 회상하는 영화들이 대부분 남성 중심적이었으며 여성은 단순히 로맨스의 대상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이 용감하고 저돌적인 여학생을 보는 것은 반갑다.

영화가 과거를 소환하는 방식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내면에 자리한 감수성과 역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 교복과 통 큰 바지, 롤러스케이트와 빵집의 디테일로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불과하다.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충청도 사투리를 살려낸 로컬시네마로서의 성취는 눈여겨볼 만한 것이지만, 복고라는 요소를 구경거리 이상의 역사적 감수성으로 살려내야 한다는 점에서 역부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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