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권서각의 시와 함께] 늦가을 볕의 임종-박승민(1964~)

늦가을 볕의 긴 손가락이

허공을 가만히 감았다 놓았다하는 사이

뒷산 갈참나무숲에는

누가 죽어 가는지

흙이 붉어 가는데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어쩔 수 없어

장수반점을 지나

흥농종묘를 지나

고추밭에 든 추월댁

체육복 등에 기대인 채

둘은 한참동안 따사로운데

늦가을 볕은 늦가을도 잡을 수 없어

늦가을 볕은 늦가을과 함께 자꾸 늙어가서

수숫단 꼭대기

잠자리 마지막 날개 위에서

한 줌 골고루 金光으로 번진 後에야

턱, 숨을 내려놓는데

체육복 등엔

어둠이 파스처럼 한 장 붙는데

-시집 『지붕의 등뼈』 푸른사상, 2011.

시는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앞의 말은 일상의 언어를 말함이고 뒤의 말은 시의 언어다. 느낌이나 생각을 기존의 언어로 말할 수 있다면 굳이 시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시의 표현 대상은 일상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세계다. 그것은 그 시인만이 체험한 정서의 깊이를 지닌다.

시인은 늦가을 저녁 무렵 햇볕의 이미지를 한 폭의 수채화로 형상화하고 있다. 늦가을 햇볕을 사람에 비유하여 이리저리 다니다가 추월댁 고추밭에 다다르게 한다. 시인은 고추밭에서 일하고 있는 추월댁 등에 비친 햇볕을 보고 있다. 햇볕은 다시 공간이동을 하여 잠자리 날개 위에서 마지막 빛을 발하고 소멸한다. 모든 사라지는 것은 애잔하고 아름답다. 늦가을 햇볕은 점점 엷어지다가 사라지는 소멸의 미학이다. 박승민 시인의 미학적 전략은 비유에 있다. 그의 비유에는 상투적인 비유가 없다. 언제나 새롭고 신선하다. 특히 어둠을 추월댁 등에 붙은 파스 한 장에 비유한 것은 탁월하다.

시인 kweon51@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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