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3월 31일,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이 지역구가 있는 대구를 찾았다. 당시 대구 경북을 포함한 5개 광역시'도는 이명박 대통령의 동남권 신공항 백지화로 여론이 들끓고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약속을 어긴 것은 유감"이라고 혹평한 그 시절 박 의원은 "공약을 지켜야 예측 가능한 정치가 된다"며 공약 불이행을 비판했다.
그보다 두 해 전인 2009년 10월 23일 국회에서 당시 박근혜 의원은 세종시 축소 의견을 낸 이명박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며 기자들 앞에 섰다. "정치는 신뢰다. 약속이 무너진다면 앞으로 한나라당이 국민 앞에 무슨 약속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당의 존립 문제"라며 대립각을 세웠다. 세종시 축소가 아니라 원안 플러스 알파를 주장했고, 관철됐다. 돌이켜 생각하면 세종시는 엄청난 비효율이자 행정 낭비이다. 세종시는 시행되지 않았어야 한다는 뒤늦은 여론이 없지 않지만, "우리가 이런 (비효율성) 문제를 모르고 한 게 아니지 않느냐"며 국민과의 약속을 더 중요하게 여긴 정치인 박근혜는 승부수를 던졌다. 결국 한 번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이미지로 각인된 신뢰의 정치인 박근혜는 대통령까지 거머쥐었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소속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과 함께 신뢰를 지킬지 버릴지 기로에 놓여 있다. 박 대통령은 대선 과정에서 국회의원들의 중앙당 간섭을 최소화하고, 풀뿌리 생활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기초단체장 공천 폐지를 새누리당 공약으로 내걸었다. 민주당도 문재인 후보의 대선 공약 사항으로 같은 말을 했고, 일찌감치 당론으로 폐지를 결정했다. 기초단체장 공천제 폐지가 꽃놀이패인 민주당은 손해 볼 게 없다. 공천제를 폐지해도 수도권 일대를 석권하고 있는 민주당으로서는 현직 프리미엄을 누릴 수 있으니 배짱편하다.
반면 수도권에 새누리당 소속 기초단체장을 심고 싶은 새누리당은 속앓이가 심하다. 소속 국회의원의 80%가 기초단체장 공천제가 유지되기를 바라지만, 국민의 70%는 폐지를 바라고 있다. 터놓고 말도 못 하는 새누리당은 정개특위가 시간을 끌다가 요술을 부려주기만 바라며, 기초단체장 공천 폐지를 없었던 일로 몰아가는 분위기다. 2월 말까지 활동 시한을 연장한 국회 정치개혁특위는 기초단체장에 대한 공천제 폐지가 위헌 소지가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더니 급기야 설밑에는 지방의원 정수를 34명이나 늘렸다. 국회의원들의 몸종이나 마찬가지인 지방의원을 대폭 불리는 퇴행 증상을 보이는데도 여도 야도 없다. 시대정신이 지방선거에서 중앙당의 영향력 축소이고, 국회의원의 특권 내려놓기인데, 얼굴에 철판 깐 정개특위는 이를 거스르고 있다.
6'4 지방선거를 120일 앞둔 내일(4일)부터 광역시'도 단체장 및 교육감 선거에 출마할 예비후보자 등록이 시작되지만, 지금 새누리당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지방단체장 공천제를 폐지하면 수도권에서 민주당이 득을 볼 것이고, 공천제를 유지하면 대통령 공약을 지키지 않는다는 국민적 반발을 감당해야 한다. 이뿐만 아니라 공천에서 탈락한 후보들이 안철수 신당으로 가서 새정치신당이 비대해지는 것을 목도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공약이라고 해서 무조건 다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후손들에게 너무 큰 부담을 지우는 과다한 복지 공약은 속도 조절을 하거나 일부 후퇴해도 봐줄 수밖에 없다지만, 돈이 들지 않는 기초단체장 공천제 폐지 공약을 번복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박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자산인 신뢰를 뒤집는 일이다.
이번 6'4 지선은 집권 2년 차에 접어든 박근혜 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의 성격이 강하다. 박 대통령도, 새누리당도 깊이 생각하고 결정해야 한다. 시경에 '흰 옥에 생긴 흠은 갈면 없앨 수 있다. 그러나 말에 생긴 흠은 결코 지울 수 없다'고 했다. 말에 생긴 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공약 뒤집기이다. 새누리당이 당리당략을 포기하고, 새정치를 시도하여 정치적 신뢰를 얻을 것인지 아니면 이제 박근혜 대통령까지 보수 재집권에 성공했으니 다른 정치인이나 마찬가지로 공약을 버리겠다고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설밑 고향을 찾은 국회의원들은 기초선거 공천제 폐지를 실천하지 않는 새누리당에 대한 질타의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이제 새누리당은 선택해야 한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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