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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춘추] 진정한 의미의 노동력

일이 삶 그 자체인 시절이 있었다. 물론 이 시절엔 노동과 휴식이라는 개념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 일과 휴식은 일 그 자체에 혼재되어 있었다. 선조들의 노동 개념은 노동이 곧 보람이고 긍지였다.

필자가 어린 시절, 사람들은 산비탈 꼬불꼬불한 논과 밭에 시장에 내다 팔기보다 가족들이 연명하기 위해 농사를 지었다. 노동은 피곤보다는 보람과 흐뭇함을 동반했다. 노동을 재화, 즉 환전 가치로만 따지는 현대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노동의 즐거움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었다.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노동하는 그 자체가 기쁨이고 내 후손의 생명줄을 내가 책임지는 강한 삶의 의욕이 넘쳐났다는 사실이다. 호롱불 밝히며 짚세기와 새끼를 밤새 꼬던 이웃 동네의 아저씨들이 아직도 아른하게 눈에 잡힐 듯 떠오른다. 가난했지만 결코 인색하지 않았던 내 유년의 시골 이웃들. 그러나 산업시대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웃들의 자녀 모두를 돈과 환전하는 노동이 버티고 있는 대처로 내보내고 가족공동체에는 쓸쓸한 공허감만 짙게 드리우고 있다.

필자는 환자들과 만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몸이 아파 노동력에 심각한 장애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노동을 하는 현대인들이 몸이 불편한 상태에선 자신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여가나 휴식의 시간을 아주 어색하게 여기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노동과 여가를 이분법적으로 사고하는 틀에서 노동도 여가도 아닌 어정쩡한 상황은 자신을 어떤 틀로 이해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론 필자가 열악했던 의료상태나 절대적 빈곤이 횡행했던 과거의 삶을 동경하거나 되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노동의 양이나 질적 가치를 논하면서 떠올리는 고단함, 피곤함이 아니라 그 자체의 즐거움을 발견하고 즐겼던 선조들의 노동에 대한 지혜만을 본받자는 바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문명사회의 비약적인 발전은 생활의 편리를 추구하기도 했지만 이와 반대로 위험인자들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생활의 편리는 안전을 전제로 할 때 유효하다. 노동은 행복을 전제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 한다. 노동을 하면서 불행해지고 노동을 팔면서 인간가치의 상실을 경험한다면 진정한 노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진정한 의미의 노동은 그 대가가 직접적이고 자신의 노동 결과가 가족이나 함께 생활을 영위하는 공동체에 전해질 때 양심적인 노동가치가 창출되고 인간미가 살아 숨 쉬는 것으로 환원된다. 내 혈육이 먹을 아침 밥상에 농약을 뿌린 배추와 시금치를 올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때 시금치와 배추를 키운 노동력은 인간미를 전제로 한 양심적인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모순이 없는 노동, 내 혈육처럼 아픈 이를 돌보는 병원의 노동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병철 365정형외과병원 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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