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 안개 속을 헤맬 때가 있다. 그럴 땐 가슴은 답답하고 눈은 뻑뻑하며 머릿속은 불투명해진다. 흔히들 디자이너는(나는 편집기획자로서 디자인에는 약간의 간여만 하는 정도이지만) 남다른 창의성이 있어야만 양질의 성과를 낸다고들 생각한다. 모든 디자이너들에게 매번 새롭고 창의적인 작업이 가능할까? 참으로 의문이다.
최종적인 디자인은 '하나'의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것의 완성 과정에는 기획과 구성, 글 디자인과 사진작업, 일러스트 등 총체적인 작업들이 녹아있다. 그래서 디자인은 하나이면서도 복합적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디자인 과정이 거쳐야할 문턱들은 점차 높아지고 있다. 비단 현대인들의 풍부하고 해박한 디자인 론(論) 뿐만이 아니다. 이젠 클라이언트의 안목도 저만치 높고 그 요구도 분명하다. 디자이너들이 체증처럼 짓누르는 강박관념에서 헤어 나오기 쉽지 않은 이유다. '좀 더 새로운 것' '차별화된 것' '트렌디한 것' 등 넘치는 기대와 요구들에 부응하고자 디자이너 스스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답을 찾아 수많은 밤을 지새우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무실 안은 디자이너들의 전전긍긍으로 공기가 무겁다. 그들에겐 '디자인은 다른 것을 교체하거나 그 자체로 빠르게 변신해야 한다'는 것이 늘 전제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디자이너가 트랜스포머도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매번 디자인 변신을 해내겠는가?
늘 새로운 것을 찾지만 디자인은 그 무엇보다도 정확한 원칙 아래 움직인다. 때때로 풀리지 않는 작업 속에 길 잃은 디자이너에겐 본질로 돌아가 볼 것을 권한다. 그것은 기획 방향을, 디자인 방향을 투명한 유리잔에 담아보는 작업이다. 디자인의 시작점을 구성하는 블록 조각들을 모두 한데 모아놓고 응시해본다. 그것들 각각이 가진 의미와 겹치는 부분, 통일성에 대한 해석이 필요하다. '새롭다'는 것도 이처럼 기초적인 구조 파악이 이루어진 다음이다. 가장 큰 차별화는 '오리지날(Original)'을 정확하게 파악한 다음에 가능하지 않은가!
누구보다도 디자인 원칙을 강조했던 이탈리아 디자이너 마시모 비넬리는 "원칙이 없는 디자인은 무정부 상태"라는 말을 했다. 본질적으로 디자인이 영구성과 연속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디자인 원칙의 잣대가 필요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참 용감하게 책 만드는 일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작업을 하면서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저 너머의 낯선 타인들, 그러나 곧 익숙해질 그들에게 말을 걸어 보며 책을 만들어왔다. 때로는 타고난 직감이 큰 힘이 되어 주기도 했고, 또 때로는 우연한 아이디어가 창의적 디자인의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반대로 지나치게 앞서가거나 엇길로 빠져 나와 남을 힘들게 할 때도 많았다.
그런 현장들을 지나오며 나는 내 디자인의 '오리지날'이 어디부터이며, 그 원칙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나의 유리잔에 수없이 담아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적합한 눈금 격자를 형성하는 법, 최상의 서체를 고르는 법을 배우고, 컬러를 다루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다.
디자인의 기회는 오늘날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나만의 자유로운 선택 방식을 만들고, 디자인의 '과정'을 다져나가고 싶은 디자이너들에게 조심스럽게 '디자인 원칙'을 들려주고 싶다. 새롭고 창의적인 것에 대한 염원이 아무리 간절해도 디자인 원칙은 고루하거나 느리거나 철지난 목소리가 되면 안 된다. 길을 잃으면 확실한 방법은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와 다시 짚어나가는 것이다.
자정을 이미 오래 전에 넘긴 창밖은 까맣다. '퇴근의 원칙'은 저 멀리 밀쳐놓은 디자인실의 불빛은 새벽공기처럼 창하다. 그들은 각자의 유리잔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일까?
편집출판디자인회사 홍익포럼 대표 gratia-de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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