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 巨人에게 길을 묻다] 제1부 박정희 대통령 6)탁월한 용인술

"부국 강조하던 모습에 감명" 재미 과학자도 귀국 결심

박정희 대통령이 포병학교장이던 시절(1955년) 자주 하던 훈시가 있다. "위관(尉官)장교는 발로, 영관(領官)장교는 머리로, 장군은 배짱으로 일하는 겁니다. 위관은 항상 사병들과 더불어 먹고 자고 발로 뛰면서 일해야 합니다. 영관장교는 머리를 짜서 자기 분야에 전념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여 상관에게 A안'B안을 제시한 다음 각각의 장단점을 설명하고 '저는 이런 이유에서 어느 안을 추천합니다'라고 건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장군은 참모로부터 추천받은 안을 선택하는 결심을 한 다음 배짱으로 밀고나가는 겁니다." 일찍부터 이 같은 인재론을 가진 박 대통령은 집권 18년 동안 주변에 다양한 인물들을 모아 그들의 능력과 개성에 맞는 일을 맡김으로써 조국근대화에 성공했다.

◆용인술의 비결, 인간미

박 대통령은 철학자와 교수, 직업관료, 군인, 과학자, 경제인 등을 두루 발탁해 적재적소에 활용한 용인술의 대가였다. 사람을 다루는 안목의 다양성과 깊이가 남다른 대통령이었다.

2011년 세상을 떠난 김완희 박사. 우리나라 전자산업 밑그림을 그리고, 최고 수출산업으로 키워낸 주역이다. 1926년 경기도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서울대 전기공학과를 나와 미국 유타대 대학원에서 전자공학박사 학위를 땄다. 일리노이대학 연구원, 미국IBM 책임연구원을 거쳐 한국인으론 처음으로 컬럼비아대학 전자공학과 교수가 됐다.

김 박사가 1968년 고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한 데엔 박 대통령과의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1968년 3월 김 박사는 미국 전자산업 전문가 일행과 함께 방한해 한국 전자공업 실상을 살펴본 후 청와대로 박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해 4월 박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하와이에서 열렸다. 김 박사는 찾아뵙지 못해 죄송하다는 편지를 박 대통령에게 보냈다. 5월 초순이 되자 한국 총영사관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대통령 친서를 보내왔다. '친애하는 김완희 박사에게! 귀한(貴翰) 감사합니다. 하와이 방문에서 많은 교포들이 따뜻하게 환영해주어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덕택으로 여행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7월경에 귀국하신다니 또다시 상봉의 기(機)를 고대하면서 귀 가정에 만복이 깃들기를 축원합니다. 4월 27일 박정희 배(拜).' 김 박사는 7월 귀국해 다시 청와대로 들어갔다. 박 대통령이 불도 켜지 않은 컴컴한 집무실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었다. 과학기술처 장관, 청와대 과학담당 수석비서관 등이 배석한 가운데 김 박사는 기술적 이해와 안목 없이는 전자공업을 제대로 육성할 수 없다는 점을 설명했다. 환대 속에 청와대를 방문했던 김 박사는 그때까지 박 대통령의 협조 요청에 결심을 굳히지 못한 상태였다. 결심이 선 것은 회식이 끝난 뒤였다. 김 박사의 회고. "자리를 파하고 일어나 떠나려는데 대통령이 현관까지 배웅하러 나오셨어요. 우리가 차에 오를 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심호흡을 하시더군요. 그리고 차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어둠 속에 홀로 선 대통령이 너무나 외로워보였습니다. 말끝마다 가난한 한국을 부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통령을 도와드려야겠다고 차중에서 결심했습니다." 1968년 귀국한 김 박사는 1979년까지 대통령 특별자문, 상공부'­체신부와 과기처 장관 고문을 거치며 전자산업의 틀을 마련했다.

◆실사구시 정신

박 대통령은 현실과 사실에 기초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 실용주의자였다. 또 잘해보려다가 실수한 부하들을 감싸줬다. 권한을 많이 주는 대신 결과를 철저히 따져 무능을 아부나 선전으로 메우려는 이들에게 현혹되지 않았다. 실무자가 사안에 대해 가장 정통하다는 소신을 가졌던 박 대통령은 장'차관을 제치고 직접 실무자를 불러 의견을 듣기도 했다, 주무 국장과 네 시간 동안 토론을 거쳐 정책을 결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 박 대통령이 좁게는 관료나 경제인, 넓게는 국민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도록 만든 원동력은 따로 있었다. 그것은 조국근대화에 대한 그의 불같은 의지와 사심없는 순수함이었다. 손병두 전 전국경제인연합회 상근부회장은 '박정희 시대'를 이렇게 표현한 적이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 회장이었고, 기업인들은 그 밑의 부문별 사장들이었으며 관료들은 그를 보좌한 스태프들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보다 감사해야 할 것은 박정희라는 탁월한 지도자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앞에서 든 김완희 박사의 회고담에선 박정희 용인술의 고갱이를 만날 수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계천 다리 밑에 사는 사람도 거기서 나와 보통의 집에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대덕단지가 만들어질 즈음 함께 시찰을 갔는데, 근처 언덕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난 여기 세계적 전자단지를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그런 꿈, 원대한 희망이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이끌었다."

1977년 박 대통령은 창원기계공단의 방위산업체와 기계공장들을 시찰하고 한국이 공업국가로 탈바꿈하는 모습에 여간 흡족해하지 않았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한턱 내지." 청와대 수석비서관들은 매우 기분이 좋아진 대통령에게 푸짐한 저녁을 얻어먹었다. 그날 술을 한잔 걸친 박 대통령은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담담한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봐도 오 수석은 국보야, 국보!" 대통령의 공개적인 찬사에 얼굴이 붉어진 오 수석은 참석자들의 부러움을 샀다. 대통령의 신임은 엘리트 관료들을 움직이는 동력이었고,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대현기자 s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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